오랜만에 경주 나들이를 하고 싶어 무작정 기차 타고 경주로 행했다 경주는 고교시절 수학여행 이후 한 번도
가보지 못하고 어느덧 66세를 넘어가고 있으니 그저 역사도시 경주는 보는 것만으로 신라고도의 위상과
경주 시가지에 많은 능이 모여 있던 그때 그 모습만 생각이 난다 그런 시절에 가보았던 그곳 경주이니
경주로 가는 내내 가슴이 설렌다
지금 생각해보면 계림이라는 곳과 참성단 그리고 안압지 포석정 등이 어렴풋이 기억나는 곳 그리고 불국사와
석굴암 이 고교시절 가던 기억이 난다 실제로 기차역에서 내려 제일 먼저 간 곳이 안압지였다 안압지 입구
들어가는 곳도 예전과 너무 많이 다라져있다
그래도 이곳이 역사도시라 추운 날씨에도 코로나에도 참 많은 인파가 이곳을 찾아 유명 장소를 걷고 있다
안압지 입장료는 안압지 연못 안의 흙을 파내는 관계로 일부분만 보게 관람로가 조성되어 옛 기역을 그리며
안으로 들어가 좌측에서 시작 우측으로 한 바퀴를 돌았다
전혀 기억은 안 나지만 오늘 와서 보니 이곳이 평범한 평지임을 알 수 있다 안압지 관람을 하고 나와 나는 동궁이라는
곳으로 이동(100M)하여 동궁의 집채는 없고 터만 남아 있지만 이곳은 조금 높은 언덕 위에 조성된 신라시대 궁굴 터
라고 한다 그 빈터가 있는 곳을 조금 걸어 들어가니 석빙고라는 얼음 보관장소가 나온다 이곳은 원래 장소에서
이동되어 이곳에 설치되었다고 안내판에 표시되어 있다
석빙고를 지나 위쪽으로 쭉 걷다 보니 우측으로 첨성대와 커다란 능과 계림이 바로 인접하여 있음을 알았다
이곳 게임 입구에도 민가 관광촌이 조성되어 있고 아치형 다리가 보인다 그리고 옆으로 게임이 있고 그 앞에 어마어마한 무덤이 나를 반긴다 참 규모가 크기도 하나
예전 사람들은 왕이나 그 부인의 능을 이렇게 크게 하여 자기가 생활하던 말과 의식주와 같은 물건과 완 관등을
무덤 속에 묻어서 지하 세계에서도 극락왕생을 발원했던 것이다 그리고 인접 넓은 평원에 잔디와 참성단으로 가기 위해
게림을 통과하는데 참 큰 나무 고목들이 줄 비하다
게임을 지나 조금 지나니 참성단이다 참성단도 몇 년 전 지진이 잇어서인지 돌 탐 여기저기에 틈이 벌어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신라시대에 우주를 관측하는 시설이 이곳 신라에 있었다 하니 우리 민족은 참 우주에도 관심이 당시로선 대단한 것 같다 참성단을 구경하고 나오는데 옜기와건물이 있어 가보니 이곳은 경주 김 씨 사당이 하나 있다
다시 앞으로 나아가니 좌측 옆으로 큰 묘가 2기가 있다 그리고 이곳은 사람이 너무 많아 코로나로 이렇게 많이 모여도
되나 싶을 정도로 정말 사람이 많기도 하다 나는 다시 오릉이 있는 곳으로 가 입장권을 발급해 들어서니 이곳은 경주의
능들이 참 많이 모여 있기도 하다 이러 구조물을 보면서 나는 천천히 릉 옆길을 걸어서 가다 보니 천마총이라는 곳 에이르니 많은 이들이 입장하려고 줄을 서고 잇다
천마총 입구에서 20여분을 기다려 입장하니 이곳에 천마총 발굴 당시 동묘와 부장품 그리고 그 통로 옆으로 이곳
릉이 있는 역사를 관람하기 좋기 원형 묘안이 잘 정리되어 있음을 그저께 한다 이토록 좁은 관 하나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도원 되어 얼마나 오랜 기간 이능에 흙을 올리고 하였는가를 생각하니 이곳 신라인들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천마총에서 나와 나는 다시 문무왕릉이 있는 대본항으로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이곳까지 버스로 경주시내에서 1시간가량을 다려서야 감은사지에 오게 되었다 오는 동안 버스에서 분황사지 등이 보인다 그리고 더 많은 시내 역사유물 현장을 못 보고 이곳 감은사지로 가게 되었다
이 글을 쓰며 오늘 내가 갔던 안압지와 동궁과 참성단에 대하여 인터넷 백과 사전에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잇다
안압지
《삼국사기》 문무왕 14년 2 월조에 의하면 “궁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라고 하여 삼국통일을 전후로 조성하기 시작하여 674년(문무왕 14)에 완성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안압지라는 명칭이 기록에 나타나기는 《동국여지승람》·《동경잡기 東京雜記》 등에서부터이므로 당시의 못 이름이나 동궁의 위치 등에 의문이 남아 있다.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안압지라는 이름을 기록하고, “문무왕이 궁궐 안에 못을 파고 돌을 쌓아 산을 만들었으니 무산십이봉(巫山十二峰)을 본떴으며…….”라고 하여 그 조성이 신선사상과 연관되어 있음을 시사해주고 있다.
1975년 3월부터 1986년 12월까지 연못과 주변 건물지의 발굴조사가 있었는데, 이때 석축호안(石築護岸)으로 둘러싸인 연못과 3개의 섬, 그리고 연못 서쪽의 호안 변에서 5개의 건물지와 서쪽·남쪽으로 연결되는 건물지들이 밝혀졌다.
석축호안의 남안은 거의 직선을 이루고 서안은 가공된 장대 석축의 기단형 방형지(方形址)가 그 일부를 못 쪽으로 돌출시켜 5개의 건물지를 이루었으며, 동·북안은 굴곡이 심한 곡선을 이루고 있었다.
동남쪽 모서리에서는 수로(水路)와 입수구(入水溝)의 시설이, 북쪽 호안에서는 출수구(出水溝)의 시설이 확인되었다. 호안석축의 길이는 1,005m로 전체면적은 1만 5658㎡, 제일 큰 섬은 1,094㎡, 중간 섬은 596㎡, 제일 작은 섬은 62㎡이다.
또한, 연못 안팎에서 출토된 완형 유물만도 1만 5023점에 달한다. 가장 많이 출토된 와전류(瓦塼類) 중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형태의 특수기와와 “調露二年漢只伐君若小舍……三月三日作……(조로 2년 한 지 벌 군 약소사······3월 3일 작)”이라는 기년명(紀年銘)이 있는 보상화 문전(寶相華文塼)이 발견되어 문헌의 기록과 일치함을 확인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라 와전류 문양 편년(文樣編年)에 결정적인 자료를 제공해주었다.
토기류로는 신라시대의 생활용 구들이 출토되었으며, 금동불상을 비롯한 금동제품과 당시 건축양식의 단편이나마 살필 수 있는 목조건물의 부재 및 장신구·주사위·목선(木船)·양물(陽物)·목간(木簡) 등도 출토되어 주목된다.
《삼국사기》에는 임해전(臨海殿)에 대한 마지막 기록으로 신라의 국운이 이미 기울어진 때인 931년(경순왕 5)에 왕이 고려 태조를 맞아 연회를 베풀었다고 하였는데, 출토유물의 시대로 미루어 보아도 10세기경까지는 왕실의 비호를 받으면서 존속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의 원지(苑池)의 원형을 보여 주는 귀중한 유적이다.
동궁과 월지
신라의 태자가 머물렀던 곳이다. 특히 임해전(臨海殿)은 군신들이 연회나 회의를 하거나 귀빈을 접대하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674년(문무왕 14)에 건립하였다고 하지만,『동경잡기(東京雜記)』에는 안압지가 건립된 시기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뒤에 만들어졌다고 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679년에 궁궐을 매우 화려하게 고쳤다고 하였고, 804년(애장왕 5), 847년(문성왕 9), 867년(경문왕 7)에는 임해전을 중수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697년(효소왕 6) 9월과 769년(혜공왕 5) 3월, 860년(헌 안 왕 4) 9월, 881년(헌강왕 7) 3월에는 군신들이 연회를 가졌다고 하였으며, 931년에는 신라의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王建)을 초청하여 주연(酒宴)을 베풀고 위급한 정세를 호소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별궁이었지만 신라 정국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매우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궁궐 안에는 현재 중국 쓰촨 성 동쪽에 있는 명산인 무산(巫山)의 12개 봉우리를 본떠 돌을 쌓아 산을 만들었고, 연못을 파고서 그 안에 전설 속의 해중 선산(海中仙山)인 봉래(蓬萊)·방장(方丈)·영주(瀛州)를 상징하는 3개의 섬을 만들고서 꽃을 심고 진기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한다. 이 연못은 바다를 상징한 것으로 보이며, 이로 인해 중심 건물을 임해전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그 뒤 1974년 11월에 안압지 준설 및 주변 정화공사가 추진되었다. 이때 기와 조각과 와당 조각이 많이 출토되었기에, 1975년 3월∼1976년 12월에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신라시대에 축조한 연못이 거의 완전하게 확인되었고, 특히 연못 주변에 쌓았던 호안석축(護岸石築)도 매우 양호한 상태임이 밝혀졌다. 연못에 물을 대는 입수구와 수로, 물이 빠져나가는 배수구 등의 시설도 잘 남아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한편 안압지 서쪽에서는 건물터와 행랑터가 확인되었으며, 그보다 더 서쪽에는 임해전으로 추정되는 비교적 큰 건물터도 드러났다. 행랑은 안압지 남쪽으로도 연결된 듯 보이지만, 그 북쪽과 남쪽은 철로와 차도에 의하여 많이 손상되었기에 전체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안압지 바닥에서는 금동불상을 비롯한 금동 제품과 목조 건물의 부재 등이 출토되었고, 특수한 모습의 기와도 적지 않게 발굴되었다. 특히 기와에는 679년인 ‘의봉 4년(儀鳳四年)’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이것은 임해전 터에서 출토된 680년인 ‘조로 2년(調露二年)’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보상화(寶相華) 무늬의 벽돌과 함께 문무왕 때 임해전이 건립되었음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유물로 여겨진다. 이밖에도 많은 토기류가 출토되었는데, 신라 고분에서 흔히 발견되는 굽다리접시〔高杯〕나 긴 목항아리〔長頸壺〕과는 다른 것으로 실생활에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동궁 및 월지 유적은 1980년에 정화공사를 거쳐 신라 궁궐의 원지(苑池)로 복원되었고, 3채의 누각도 발굴조사 때 출토된 목조 건물 부재와 신라시대의 다른 유적들을 참조하여 복원되었다. 그 밖의 건물터는 주춧돌만 정연하게 확인하여 원래의 모습을 추측할 수 있도록 정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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