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반구대 암각화 20220301

한마음주인공 2022. 3. 2. 14:27

 

여행코스 : 구언양시외버스터미날  → 308번울산시내버스 타고 →언양읍행정복지센터옆 → 언양읍성이 버스에서보이는도로 → 양우내안아파트앞 →반구대삼거리하차(반구대입구) → 걸어서 천전육교위를지나 → 반구대길앞길 도로을 25분을 따라걷다 →좌측200m 야산능선길걷기 → 이산정상에서 남서방향으로 내리막 돌길을15분 걷다가  → 바로앞 울산반구대암각화박물관 앞으로 75도 암길급경사구간으로 내려와 도로건너 →암구대암각화박물관 관람(2층규모 암각화전시관련물잘되있음) → 박물관ㅇ에서 나와 좌측으로 나가 반구교를 건너 → 반구서원앞 → 포은정몽주 집사정앞 →대곡리 공륭발자국화석관람 → 울산대곡리 반구대암각화 관람광장 →  40m 강건너 암각화 망원경으로 20분 확인 →다시암각화박물관앞으로 나와 →반구대삼거리로 가는 반구대앞길을 차도를 따라 걸어서 반구대 삼거리 정류장 도착 오후6시20 →

정류장에서 30분 그다려 언양읍으로 가는 308번을 어둑한 저녁에 승차하여 →  언양시외버스터미날하차 오후7시25분

 

반구대로 이어지는 좌측 산길을 오르며

 

 

오랜만에 울주군에 있는 반구대 압각화가 있는 곳을 여행하게 되었다 반구대 (절벽이 있는 산등성)을 가기

위해언양 시외버스 터미날에서 내려 반구대가 있는 울산 울주군 두동면 반구대안길 254 구(지번) 주소두동면 천전리 333-1 (지번)일대로 가기위해 이곳에서 308번 시내버스를 타고 20여분을 달려 반구대삼거리(반구대입구)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1시간을 처음에는 자동차도로로 하여 걷다가 좌측산으로 올랐다

 

 

 

나즉막한 이산길은 사실 오늘3/1 여기를 오기 전 오후 4시에 언양 시외버스터미날에서 2분의 하산한 산행일행에게서

반구대삼거리에서 버스하차한후 도로를 걷다가 조그만 좌측산으로가 산을 넘으면 된다하기에 이말을 듣고 산길을 걷는데 낙옆이 산길에 수북하고 아득하고 조용한 산길이라 좋앗다

 

 

이산길로 들어섰다가 중간에서 능선 중심으로 가지않고 자측 작은길로 갔다가 그만 그끝이 패기된 묘로 가는 길끝이어서 그자리에서 다시 우측 능선 직선으로하여 좌측으로 오르니 산길이 나와있다 그길을 따라 오르다 산정상에서 없어져서 다시 동남으로 이어지는 길을 눈짐작으로 간파하여 걸으니 어슴으레 낙엽 쌓인 산길을 내려갔다

 

이어 조금 내려가닌 75도 경사의 암길이나오고 길은 없어졌다 낙옆이 있는 돌 비탈길이 왜그리 미끄러운지 눈에서도

잘 넘어지지 않는길을 5번이나 넘어지며 겨우 겨우 드문 드문 있는 나무에 의지하며 간신히 내려 가니 바로 앞에

암각화박물관 건물 지붕이 보인다 안도의 한숨으로 다왔구나 하는 마음으로 겨우내려왔다

 

 

최근들어 이런 급경사 하산 산길을 처음인듯하다 그리고 낙엽이 바위를 덥어  왜 그리도 미끄러운지 정말 위험한 산길이었다 이윽고 도로가나와 도로를 건너니 바로 암각화 박물관이다 이때 시간이 5시20분이어서 얼르 박물관을 관람하고 나와 다시 반구교를 건너 2km 정도를 내려가다가 반구대서원과 공룡화석발자국 을 지나 걸어가니 암구대 암각화 광장이다

 

 

난생처음 이곳을 방문한 나는 암구대 암각화를 직접가서 확인하는줄 알았는대 40m떨어진 거리에서 망원경으로 보는

것이었다 나는 근처 문화자관리소로가 근무하는 아저씨에게 문위하니 에전에 이곳을 하부에 댐이 있어 수몰되어 암각화가 매수되어 볼수가 없자 다시 암각화가 있는 상부쪽에 댐을 만들어 지금은 개천물은 흐르지만 암구대바암각화가 물에 수몰되지않도로 한다고 한다

 

반구대암각화박물관에서 20220301

 

 

그리고 이곳 지형의 반구대 돌이 참 단단한 암으로 된것이 특징이었다 이것이 국보로 지정 되었다 하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이군은 국보급 문화재가 지정됨에 따라 이곳에 사는 농지주들은 농사에 어려움이 많은듯 암각화로 가는 길목 여기저기에 문화유산지정보다 거주인의 민원부터 해결하라는 포스터가 많이 보인다

 

 

이곳 광장은 온갖 산으로 둘러쌓인 산주이다 물줄기가 굽이 굽이 돌아 풍수가 수렴하고 풍경이 좋아서인지 고려시대 학자인 포은 정몽주가 유배하면서 풍류를 줄기던 곳이라고 안내판에 안내한다 그리고 실제대 반구대가 형성되어잇는곳이 이곳 산넘에도 있다고 한다 

 

 

 

나는 시간도 늧고하여 이곳만 방문하고 이내 내가 걸어왔던 반구대 삼거리로 가기위해 반구대암각화박물관앞으로하여

반구대앞길도로 걸어서 이내 차도로만 반구대 삼거리로 되돌아 나오는데 좌측에 흙으로된 집 여러채와 그리고 이곳 입구 자동차주차장을 만드는 곳을 지나 40분만에 차도로 걸어서 반구대삼거리정류장 (반구대 입구)로 걸어나오니 이때

시간이 오후 6시 20분이다

 

 

이곳에서 울산시내버스를 기다리는데 날은 저물어 해는지고 정류장 전등빛으로 좌측에서 올 시내버스 308번을 기다리기를 30분이 넘어서 오후 6시55분에서야 타게되어 다행이었다 이어 언양 시외버스터미날에 도착하니 오후725분이다

이곳은 좀 울산시내에서 떯어져 이곳을 대중교통으로 접근하기가 쉽지않다 그리고 이곳운행시간대가 1시간에 1대꼴이라 기다림이 너무 지루아였다

 

 

 

이글을 쓰면서 반구대암각화에대한 궁금증이 있어 인터넷 배과사전에 확인하니 다음과같이 기술하고 있다

울산반구대암각화

1971년 문명대, 김정배, 이융조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1995년 국보 제285호로 지정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선사시대 암각화 유적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으며 약 300여점의 그림들이 새겨져 있다. 바위에 새겨진 그림 중에서 고래를 사냥하는 매우 사실적인 그림은 약 7000년 전 신석기시대에 제작된 것으로서 지구상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고래사냥 그림으로 평가되고 있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999-1 일원에 위치하고 있다.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유적은 울산 태화강 지류에 해당하는 대곡천변의 깎아지른 절벽에 너비 약 8m, 높이 약 3m 가량의 판판한 수직 암면에 그림이 집중적으로 새겨져 있다. 주변 10곳의 암면에서도 소수의 그림이 확인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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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의 암질은 셰일(shale)과 혼펠스(hornfels)로 구성되어 있다. 암면의 방향은 북향으로 석양이 질 무렵에만 잠시 빛이 들어오며 윗부분이 앞으로 돌출된 암음(岩陰) 구조로 되어 있다. 유적 발견은 천전리 각석을 발견한 이듬해인 1971년 12월 25일 문명대, 이융조, 김정배가 천전리 각석을 답사하는 과정에 지역 주민의 제보를 통해 이루어졌다. 1984년 동국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간한 최초의 보고서에서는 191점의 그림이 소개되었으며, 2013년 울산암각화박물관이 실시한 정밀조사를 통하여 모두 307점의 형상이 표현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림은 주제에 따라 크게 사람의 전신(全身)이나 얼굴을 표현한 인물상(人物象), 바다와 육지동물을 표현한 동물상(動物象), 배나 부구(浮具)와 같은 수렵이나 어로와 관련된 도구상(道具象), 그림의 주제나 형태를 명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운 미상(謎象)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인물상은 측면(側面)을 표현한 전신상이 많으며 활로 동물을 사냥하거나 두 손을 치켜든 모습, 악기로 보이는 긴 막대기를 불고 있는 모습 등은 사냥과 일종의 종교적 행위를 연상시키고 있다. 측면 전신상의 대부분은 다소 과장된 남근(男根)을 표현하고 있으며, 사지를 벌리고 있는 정면상이나 가면처럼 얼굴을 표현한 그림도 있다.

 

 

 

 

동물상들은 구체적인 종 구분이 가능할 정도로 각 동물의 형태와 생태적 특징들을 잘 표현하고 있다. 동물그림에서는 고래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주암면 좌측 편에 집중되어 있다. 반면 사슴과 같은 발굽동물과 호랑이와 표범, 늑대와 같은 육식동물들은 주암면 우측 편에 많이 새겨져 있다. 구체적인 종 구분이 가능한 동물로는 북방긴수염고래, 혹등고래, 참고래, 귀신고래, 향유고래와 같은 대형고래류와 바다거북, 물개, 물고기, 바다 새와 같은 바다동물, 백두산사슴, 사향사슴, 노루, 고라니, 호랑이, 표범, 늑대, 여우, 너구리, 멧돼지 등의 육지동물이 있다.

 

 

 

고래는 대체로 20~30㎝ 정도 크기의 그림이 가장 많으며 큰 것은 80㎝ 정도이고 작은 것은 10㎝ 정도이다. 대부분의 고래 그림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본듯한 조감적(鳥瞰的) 표현으로 머리를 위로 향해 무리지어 헤엄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측면으로 새겨진 고래의 경우는 꼬리를 엇비스듬하게 새긴 “비틀림 화법”을 사용하여 물고기와 구별되는 고래의 수평 꼬리를 의도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새끼를 업고 있는 어미고래나 물 위로 도약하는 모습 등 고래의 생태적 특징을 매우 생동감 있게 표현한 그림들도 있다. 몸통을 수평으로 배를 뒤집고 있는 고래 그림은 이미 죽은 것으로 표현한 것으로 판단되며 몸통에 새겨진 줄무늬는 일종의 분배(分配) 또는 해체(解體) 선으로 여겨지며 민족지 자료에서 볼 수 있는 원주민들의 고래 분배 그림과 매우 유사하다. 이와 같은 그림들은 고래와 같은 대형동물의 사냥과 분배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공룡발자국20220301

 

 

 

육지동물들은 주암면 우측편에 집중되어 있다. 고래와 달리 대부분 측면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이는 네발 달린 육지동물의 형태를 가장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는 화법이다. 사슴류에서 뿔을 관찰할 수 있는 종은 백두산 사슴, 우수리 사슴, 수컷 노루 등이 있으며, 이외 몸통의 형태, 털 무늬, 꼬리와 다리 길이 등을 통하여 종 구분이 가능하다. 육식동물은 몸의 무늬와 꼬리와 다리의 길이, 어깨선 등으로 판단할 수 있다. 유적에서 이런 방법을 통해 구분할 수 있는 종류는 백두산사슴, 사향사슴, 노루, 고라니 등이 있다. 고래와 사슴류는 몸통의 내부를 모두 쪼아 표현한 그림이 많으며 육식동물은 외곽선과 무늬만을 선으로 표현한 것이 많다. 이러한 차이는 그림의 중복관계를 따져 볼 때 시간적 차이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유적에서는 고래류, 사슴류, 육식 동물의 순으로 비중을 갖고 있으며 거북과 물개, 물고기, 조류 등도 소수 확인할 수 있다. 주암면 좌측 상단에 새겨진 세 마리의 거북은 마치 무리지어 헤엄치는 고래를 인도하는 장면으로 표현되어 있다. 바다거북은 산란을 위해 초봄에서 여름 사이에 해안으로 오르기 때문에 흔히 민족지에서나 고대 신화에서는 바다와 육지를 넘나드는 상징적 동물로 해석되곤 한다. 물고기는 측면으로 표현된 상어와 물 위를 뛰는 연어로 보이는 물고기 머리 부분이 표현되어 있다. 바다 새 그림은 항상 고래 주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는 먹이를 사냥하는 고래 주위에 몰려든 바다 새를 연상시킨다. 동물그림 중에서는 먼 바다를 회유(回遊)하는 대형고래와 육지동물 중에서는 짝짓기 하는 장면이나 털갈이와 무늬, 낙각(落角) 등을 통해 계절을 유추할 수 있는 그림들도 있으며, 주로 환절기와 번식기에 나타나는 생태적 특성을 표현한 그림들이다.

 

 

 

 

도구상은 사냥·어로와 관련된 것으로 배와 부구, 작살, 그물, 어살, 활 등으로 유적의 조성시기와 당시 생활상을 이해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유적에서는 그물을 이용해 고래를 잡는 장면과 호랑이를 포획하는 장면의 그림이 있다. 아직까지 선사시대 그물이 발굴된 사례는 없지만 동삼동 패총에서 출토된 토기표면에 찍힌 미세한 그물 망 흔적을 볼 때, 당시 어로뿐만 아니라 사냥에서도 그물이 널리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지금까지 흔히 목책(木柵)이나 울타리로 해석되어온 그림의 경우, 초기에 제작된 도면과 달리 실제 암면에서는 육지동물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내부 형상의 윤곽선이 물고기와 유사하여 목책보다는 어살의 형태와 유사하다. 일부 연구자들은 이를 배나 무리를 지어 춤추는 사람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국내 유적에서 발굴된 사례는 없지만 일본의 죠몽[縄文]시대 유적에서 연어와 숭어잡이 어살이 확인된 바 있다. 그림만으로 이를 단정하기 어렵지만, 주제가 불분명한 이 그림을 통해 목축(牧畜)을 유추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유적에서는 고래 사냥을 매우 상세하게 표현한 장면들을 볼 수 있다. 고래 주변에 새겨진 배에는 17명, 7명, 5명 가량의 사람이 승선하고 있다. 배는 뱃머리와 고물이 반달처럼 휘어져 있으며, 고래 몸통에 박힌 작살과 줄에 매달린 부구와 연결되어 있다. 이는 지금까지도 행해지고 있는 원주민들의 고래사냥에서 사용되는 도구들과 거의 동일하다.

 

 

 

 

 

미상은 정확한 주제와 내용을 알 수 없는 그림으로서 그림의 상태가 양호하나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주제미상(主題迷象)과 오래 세월을 거치면서 마모와 탈락 등으로 판독(判讀)이 어려운 형태미상(形態迷象)으로 세분할 수 있다. 이 중에는 일정한 패턴을 지닌 기호로 볼 수 있는 그림도 있겠지만, 유적에 표현된 그림만으로는 이를 구별해 내기는 어렵다. 기호는 실제 현실 속에서 볼 수 없는 관념적 표현물로 최소한의 반복적인 표현으로 일정한 패턴을 찾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암각화는 단단한 돌연모를 사용해 쪼기, 갈기, 긋기 수법으로 제작되었으며 각흔(刻痕)의 깊이와 폭, 크기, 밀도, 표현 기법을 통해 크게 4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돌연모와 금속으로 새긴 그림은 각흔의 형태를 분석하여 구분할 수 있다. 대체로 돌 연모의 경우 단면의 형태가 “⋃”자 형이며 금속의 경우 “⊔” 자 형 또는 “⋁”자 형을 띤다. 이외에도 각흔의 깊이와 너비, 균일도(均一度)에서 그 차이를 어렵지 않게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유형Ⅰ은 쪼기 기법을 사용해 새긴 그림으로 형상의 크기가 작고 각흔의 깊이가 얕은 편이다. 전체 형상을 점 쪼기로 표현하였으며 고래를 사냥하는 장면이나 작은 동물, 주제를 알 수 없는 그림들로 구성되어 있다. 암면에서 가장 먼저 새겨진 그림에 해당한다.

 

 

 

 

 

유형Ⅱ는 흔히 면 그림으로 분류되어온 것으로 쪼기 기법을 사용해 그림의 내면을 모두 쪼아 내거나 일부는 자연면을 이용해 새끼 고래나 작살 등을 양각(陽刻)으로 표현한 것도 있다. 고래에 박힌 작살처럼 외곽을 긋기로 마무리한 그림도 있다. 점 쪼기에 비해 그림의 크기가 크고 각흔의 깊이가 상대적으로 깊고 규칙적인 편이지만 각흔이 다소 거칠게 남아 있다. 이 유형으로 표현된 그림들은 주 암면의 좌측 편에는 고래와 같은 바다 동물을 우측 편은 사슴이나 늑대, 여우와 같은 육지 동물들을 주로 표현하고 있다. 바다와 육지 동물의 비중은 거의 비슷하다.

 

 

 

 

 

 

유형Ⅲ은 흔히 선 그림으로 분류되어온 그림으로 각흔의 깊이가 깊고 쪼기와 함께 갈기 수법을 사용하였다. 그림의 윤곽선이 비교적 매끈하게 마무리 되었으며, 쪼아 새긴 각흔도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 유형에서는 바다 동물이나 사슴류보다는 호랑이나 표범과 같은 육식동물의 비중이 매우 높은 편이다. 유형Ⅱ와 유형Ⅲ은 그림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그림의 주제에서도 바다동물에서 육식동물이란 뚜렷한 변화를 관찰할 수 있다.

 

 

 

 

유형Ⅳ는 쪼기와 함께 갈기 기법으로 이전에 새겨진 그림들을 많이 훼손하고 새긴 것으로 도약하는 고래와 새끼 멧돼지 그림이 있다. 전체적으로 그림이 크고 그 수도 적다. 그림의 중복관계를 통해서 선후관계를 유추할 수 있으며 후대로 갈수록 바다동물의 비중이 감소하고 육지동물과 육식류의 비중이 증가한다. 흥미로운 점은 암각화 유형의 주제 변화와 신석기시대 패총에 포함된 동물 유체의 비중에서 어떤 관련성을 찾아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암각화에 새겨진 그림은 단순히 사냥의 대상을 그대로 표현했다기보다는 관념적 표현물로 이를 직접적으로 비교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한데에 노출된 암각화는 정확한 제작연대를 추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유적 발견당시부터 조성연대를 두고 연구자들 간에 많은 이견이 존재하고 있다. 연구자들 사이에 견해차는 있겠지만 대체로 신석기시대 말에서 청동기시대 초기까지로 보는 견해가 많다. 그러나 전혀 다른 주제를 담고 있는 천전리 암각화가 유적에서 불과 2㎞ 내에 위치하고 있는 점, 우리나라 남부지방 전역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 암각화에서 표현된 검, 동심원, 음문, 검파형, 이외 추상적인 기하문 등의 그림을 유적에서 전혀 볼 수 없다는 점에서 이들 유적을 모두 동시대로 보기는 어렵다.

 

 

 

 

 

 

최근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조성시기를 밝히려는 좀 더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분석들이 시도되고 있다. 울산과 동남해안 일대의 패총에 포함된 동물유체 분석결과와 울산만 고(古)환경 연구 등에 따르면, 유적 조성의 중심연대는 지금으로부터 약 7,000~3,500년 전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부산 동삼동 패총출토 사슴문 토기, 그물문 토기, 조개가면, 양양 오산리 얼굴상, 통영 욕지도 패총 멧돼지 토우, 울산 신암리 여인상, 울산 세죽리 패총 물개 토우 등 암각화에 표현된 그림의 주제와 관련된 많은 유물들은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볼 수 있다.

 

 

이외에도 2005년 창녕 비봉리 패총에서 배가 발굴된 바 있으며, 2010년 한국문물연구원이 실시한 울산 황성동 패총 발굴조사에서는 고래사냥을 실증적으로 밝혀주는 작살이 박힌 고래 뼈가 출토되었다. 이는 반구대암각화의 제작연대를 추정해볼 수 있는 결정적인 물증자료로서 과거 울산만과 해안지역에서 적어도 7,000년 전부터 고래사냥이 이루어졌으며 반구대암각화는 당시 고래 사냥집단에 의해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당시의 생업 환경, 사냥과 어로 도구, 관련 유물, 시대적 맥락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볼 때 암각화 유적의 조성연대는 신석기시대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