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코스 :
백운동 탐방지원센터 ⇒ 만물상 ⇒ 상어덤 ⇒ 서성재 ⇒ 칠불봉 ⇒ 상왕산 ⇒ 토신골 탐방지원센터 ⇒
만물상으로 오르고 오르다 보니 상어덤사이 나온다 상어이빨처럼 뻗은 구간이 정말 신기하기만 하다
이곳에서 사진을 찍어놓고 다시 서성재 구간으로 갔는데 이곳 이 예전 상주에서 가야로 넘어가는 고개라 한다
그리고 이곳에 국림공원 지킴이가 안전을 위한 산행을 안내한다 탁자도 있고 그런대로 산행인을 배려가 덧 보인다
다시 서성재에서 칠불봉 방향으로 가파른 돌길을 오르다 배가 고파워 산행길 좌측에서 점심을 먹었다
칠불봉이 닥아 올수록 더 가파른 계단과 암벽이 나를 압도한다 헐떡이는 숨을 토해가며 드디어 칠불봉이다
칠불봉 정상능선에서 상왕산이 서편으로 약3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드디어 오늘 가야산에서 제일 높은
칠불봉과 상황봉을 다 오르게 된것이다
이처럼 상왕산과 칠불봉이 있는 이곳이 해인사라는 법보종철이 위치함이 있음을 자연히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잠시
상황봉 정상에서 주변 경관을 살펴보고 다시 해인사 방향으로 내리막길을 걸어가니 조금 후 커다란 바위가 나오며
시원한 바람을 맞게 된다
이어서 한참을 내려오다 석가여래불상이라고 안내판이 나와 가보니 서가여래 입상이 쓸쓸하게 팔이 없고 몸체와
얼굴모습이 나와 잠시 사진을 찍고 다시 돌아 나와 해인사로 발길을 돌려 본다
이어서 한참을 밋밋한 산길을 내려오며 올라온 출발 코스와 너무 대조적인 하산길을 내려왔다
이어 40분 이상을 내려오니 용탑선원이라는 사찰이 우측에 있어 들어가 참배하고 마침 기도하고 나오는 스님과
셀핑사진을 하나 찍었다 스님의 웃는 모습에서 나를 위한 부처님 모습을 뵙는 기분이다 그리고 다시나 와 다리를 건너
해인사 경내로 들어가 30분간 관람하고 다시 주차장 방향으로 4시 반 이전에 도착이라 조금 서둘러 발길을 옮겼다
주차장으로 내려오는 해운사 통과 개울물이 말고 깨끗하여 자연경관과 더불어 해인사 주변의 산세도 더욱더 아름다워 보
였다 오늘 산행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만물상 구간이었고 이어 칠불봉 정상과 상황봉 정상에서의 주변 경관이었다 이번
산행은 덤으로 해인사라는 법보사찰관람과 더불어 용탐선원 스님과의 짧은 인연 사 진 이이 별미를 더해주었다
이 글을 쓰면서 칠봉봉과 상황산 그리고 용탑선원 해인사에에 대하여 좀 더 알아보기 위해 인터넷 백과 사진에
들어가 보니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칠불봉
가야산 국립공원과 인접한 가야산칠불봉마을은 해발 500m 이상의 비교적 고지대에 위치한 마을이다. 산이 가까워 봄이면 고로쇠‧거자수액을 채취하기도 하고 야생화나 조류관찰 등의 자연학습에 적합한 청정환경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다
상왕봉
주봉인 상왕봉(象王峯, 1,432.6m), 칠불봉(七佛峯, 1,433m)과 두리봉(1,133m)·남산(南山, 1,113m)·단지봉(1,028m)·남산 제1봉(1,010m)·매화산(梅花山, 954m) 등 1,000m 내외의 연봉과 능선이 둘러 있고, 그 복판에 우리나라 3대 사찰 가운데 하나인 해인사와 그 부속 암자들이 자리하고 있다.
가야산 일대에서 해인사가 있는 치인리에 모이는 물은 급경사의 홍류동(紅流洞) 계곡을 이룬다. 그리고 동남방으로 흘러 내려와 가야면 황산리에서 낙동강의 작은 지류인 가야천이 된다. 가야산을 만드는 산맥을 보면,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덕유산(1,614m)에 이르러 원줄기는 남쪽의 지리산으로 향한다.
한편, 하나의 지맥이 동쪽으로 뻗어 대덕산(大德山, 1,290m)·수도산(修道山, 1,316m)과 단지봉(丹芝峯, 1,327m)을 거쳐 가야산에 이르러 크게 산세를 이룬다. 동쪽과 남쪽으로 낙동강 본류와 황강(黃江)을 굽어본다. 가야산 상왕봉 정상에서 바라보면 서쪽으로는 덕유산이, 남쪽으로는 지리산이 멀리 보인다.
가야산 일대의 지질은 화강편마암 및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해인사와 신촌락(新村落)이 있는 치인리골과 홍류동 계곡은 화강암침식곡이다. 《택리지》에서 우리 나라 산을 돌산과 토산으로 구분하고, 가야산을 예찬한 부분을 볼 수 있다.
“경상도에는 석화성(石火星)이 없다. 오직 합천의 가야산만이 뾰족한 돌이 줄을 잇달아서 불꽃같으며, 공중에 따로 솟아서 극히 높고 빼어나다. 골 입구에 홍류동과 무릉교(武陵橋)가 있다. 나는 듯한 샘물과 반석이 수십 리에 뻗쳐 있다.”라고 한 것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돌산의 봉우리와 골과 천석(泉石)을 예찬한 것이다.
가야산의 기후는 대륙성 기후의 특색을 나타내어, 기온의 연교차·일교차가 매우 크다. 또, 해인사 일대는 고도가 높기 때문에 겨울에는 합천군의 1월 평균 평지기온 ·1.1℃보다 5℃ 이상 낮다.
강수량은 여름철 지형성 강우로 연강수량 1,100㎜ 이상이며, 하계집중현상 또한 높다. 홍류동 계곡과 해인사 일대 등 높이 1천 m까지는 소나무와 전나무를 주종으로 한 3백 여종의 수목이 빽빽이 들어차 있고, 정상에 가까워지면서 초본식물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정상 부근에 있는 매발톱나무·수수꽃다리·둥근 정향나무·백리향의 군락은 특기할 식물이다.
동물상은 부엉이·꾀꼬리·꿩·산까치 등 1백 여종의 조류와, 멧돼지·너구리·산토끼 등의 포유류를 볼 수 있다. 이밖에 비단개구리 등 희귀 동물도 서식하고 있다.
가야산은 예로부터 ‘조선팔경’ 또는 ‘12대 명산’의 하나로 꼽혀왔다. 1966년 가야산 해인사 일원이 사적 및 명승으로 지정되고, 1972년 10월에는 다시 가야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가야산의 연봉과 능선은 동남방의 홍류동 계곡 쪽 출구를 제외하고는 모두 급사면을 형성한다. 그렇기 때문에 서쪽으로 마령(馬嶺)을 넘어 거창으로 가는 소로가 있으나 예로부터 주요 교통로가 동남방으로 홍류동 계곡을 끼고 내려와 합천군 야로면을 통하여 형성되었다.
가야산은 선사시대 이래 산악 신앙의 대상으로서, 고려팔만대장경판을 간직한 해인사를 품에 안은 불교성지로서, 그리고 선인들의 유람과 수도처로서 이름을 떨쳐왔다. 그런 이유로 가야산은 민족의 생활사가 살아 숨 쉬는 명산이자 영산(靈山)이라 일컬을 만하다.
가야산의 이름은 가야산 외에도 우두산(牛頭山)·설산(雪山)·상왕산(象王山)·중 향산(衆香山)·기달산(怾怛山) 등 여섯 가지가 있었다고 한다(新增東國輿地勝覽 卷30). 《택리지》에 가야산은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을 떠나 있으면서도, 그 높고 수려함과 삼재(三災 : 旱災·水災·兵禍)가 들지 않는 영험함을 말하여 명산으로 불렸다.
가야산 지명의 유래에 관하여는 두 가지의 설이 있다. 먼저의 주장은 가야산이 있는 합천·고령 지방은 1,2세기 경에 일어난 대가야국의 땅으로, 신라에 멸망한 뒤로 처음에는 대가야군으로 불렸다. 따라서, 이 산이 대가야 지방을 대표하는 산이며 가야국 기원에 관한 전설도 있는 까닭에, 옛날 가야 지방이라는 역사적 명칭에서 가야산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주장은 인도의 불교 성지 부다가야(Buddhagaya) 부근 부처의 주요 설법처로 신성시되는 가야산에서 이름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또, 이 산의 정상부가 소의 머리처럼 생겼고, 오랜 옛날부터 산정에서 행하여지는 산신제의 공물을 소에 바치고 신성시하여 왔다.
즉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의 이름은 우두였다. 그런데 불교가 전래된 뒤 범어(梵語)에서 ‘가야’는 소를 뜻하고, ‘가야산’은 불교 성지이므로 ‘가야산’이라는 이름으로 정착되었다고 보는 것이 또 다른 주장이다.
이와 관련하여 주봉 상왕봉의 ‘상왕’은 《열반경》에서 모든 부처를 말하는 것으로, 이 또한 불교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결국 ‘가야산’이라는 명칭은 이 지방의 옛 지명과 산의 형상, 산악 신앙, 그리고 불교 성지로서의 다양한 의미를 함축한 것이다.
해인사
가야산을 논할 때 해인사와 떼어 놓고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그 지명에서부터 말하여 준다.
첫째, 가야산은 그 지명과 산신 전설에서 옛 가야 지방을 대표, 상징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국의 명산에는 산신이 있는데, 가야산신은 정견모주라는 여신이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가야산신 정견모주는 천신 이비가지(夷毗訶之)에 감응(感應)되어 대가야왕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의 왕 뇌질청예(惱窒靑裔)를 낳았는데, 뇌질주일은 대가야의 시조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 뇌질청예는 금관국(혹은 本伽倻라고도 함) 시조 수로왕의 별칭이라 하였다. 김수로왕의 건국 전설에는 가야의 북동 경계를 가야산으로 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한편, 이른바 오가야 가야연맹의 맹주는 지금 가야산이 있는 고령군·합천군 일대의 대가야와 김해를 중심 한 금관가야였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가야 시대에 가야산은 낙동강 중하류 일대 가야 연맹의 성산(聖山)으로 산악 신앙의 대상이며, 산신 정견모주는 가야 지역의 여신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해인사 경내에 있었다는 정견천왕사는 가야산신의 사당이다. 또한 가야산 정상에서 근래까지 지내온 산신제는 옛 가야 지방의 신이 산악 신앙 형태로 잔존한 것이라고 하겠다.
둘째, 호국불교의 성지로서 상징된다. 《택리지》에 가야산을 비롯한 열두 명산이 “세상을 피하여 숨어 사는 무리들이 수양하는 곳으로 되어 있다.” 하고, 또 “옛 말에 ‘천하의 명산을 중이 많이 차지하였다.’ 하는데, 우리나라는 불교만 있고 도교는 없으므로 무릇 이 열두 명산을 모두 절이 차지하는 바 되었다.” 하였다.
해인사는 가야산의 품에 안김으로써 거찰(巨刹)이 되었고, 가야산은 해인사를 옷자락 속에 둠으로써 더욱 명산·영산의 이름을 얻었다. 《세종실록》지리지의 “가야산 형승은 천하에 뛰어나고 지덕은 해동에 짝이 없으니 참으로 수도할 곳이다.”라는 옛 기록은 바로 이를 말함이다.
우리 나라 대부분의 대사찰이 그렇지만, 특히 해인사는 창건과 그 뒤 수차의 중흥이 모두 국가의 각별한 지원에 힘입었다. 애장왕의 보은 창건, 고려태조의 귀의(歸依), 조선태조의 발원(發願), 그리고 세종·세조·성종의 중창 지원은 각별한 것이었다.
해인사가 민족의 고귀한 문화유산인 고려팔만대장경판을 6백 년 가까이 고이 보전함으로써, 법보종찰(法寶宗刹)의 명성을 누리고 더욱 민족과 국가의 아낌을 받았다. 이러한 해인사의 흥창과 명성은 뛰어난 형승과 따를 수 없는 지덕을 가지고, 또 삼재불입(三災不入)의 영기(靈氣) 서린 가야산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가야산 해인사는 또 국가가 위란(危亂)에 처했을 때 일어난 불교 호국 전통의 중심지였다. 신라 말에서부터 시작된 해인사 승군(僧軍)의 전통은 희랑(希郎)이 군을 일으켜 고려 건국을 도운 것, 임진왜란에 승군 의병을 지휘한 유정(惟政)이 만년을 가야산에서 지내다 입적한 사적으로 이어진다. 또, 민족 항일기에 해인사는 청년 승려들이 중심이 된 독립 만세운동과 항일 운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셋째, 가야산은 최치원(崔致遠)의 은둔 이후 역대 문인들의 유람과 풍류의 이상향으로 그려졌다. 《택리지》에 “산수는 정신을 즐겁게 하고 감정을 화창하게 한다. 살고 있는 곳에 산수가 없으면 사람이 촌스러워진다. 그러나 산수가 좋은 곳은 생리(生理)가 박한 곳이 많다. ……한낱 산수만 취하여 삶을 영위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기름진 땅과 넓은 들에, 지세가 아름다운 곳을 가려 집을 짓고 사는 것이 좋다. 그리고 십 리 밖 혹은 반나절 길쯤 되는 곳에 경치가 아름다운 산수가 있어, 생각이 날 때는 그곳에 가서 시름을 풀고 혹은 유숙한 다음 돌아올 수 있는 곳을 장만해 둔다면, 이것은 자손 대대로 이어나갈 만한 방법이다.” 하고 산수를 유람하는 뜻을 정리하였다.
여러 문헌에서 확인되듯, 가야산의 아름다움은 여러 사람에게 칭송의 대상이 되었다. 가야산의 수려한 석봉과 골짜기를 흐르는 계류가 사계절에 변화하는 주위 수목과 어우러져 선인들을 풍류에 도취하게 하였음이 틀림없다.
우리 선현들이 산을 유람하는 뜻이 단순히 풍류에서만 그치지 않았음이 정구(鄭逑)의 〈가야산기행문〉에서 뚜렷이 나타나 있다. 즉, 유람객의 구경거리가 되는 산의 훌륭한 경치는 인자(仁者)로 하여금 산의 오묘한 생성의 이치를 보고 자성(自省)하게 하는 것이며, 높은 곳에 오르는 뜻은 “마음 넓히기를 힘씀이지 안계(眼界) 넓히기를 위함이 아니다.”라고 적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가야산 정상에 오른 심회를 “천 년 처사의 마음, 말 없는 가운데 합하네(默契千年處士心).”라고 읊었다. 최치원의 입산 이래 천 년 동안 수많은 선현들이 가야산을 유람하여, 혹은 바위에 새겨지고 혹은 문집에 남겨 전하는 시와 문장들에 의하면, 경승지를 유람하는 보다 깊은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가야산은 우리 민족의 유구한 생활사를 통하여 고대 가야국의 산신이 있는 명산으로서, 법보종찰인 해인사를 품 안에 안은 호국불교의 성지로서, 빼어난 경승을 자랑하는 유람처로서 우리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
(1) 해인사가야산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들지 않았으나 해인사는 임진왜란 후에 7차의 대화재를 겪어, 50여 동의 해인사 건물들은 대부분 2백 년 이내에 중건된 것들이다. 그러나 불가사의하게도 민족의 보물인 고려팔만대장경판과 이를 봉안한 장경각만은 한 번도 화를 입지 않고 옛 모습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해인사는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에 있다. 이 절은 화엄 10찰의 하나이고, 팔만대장경판을 봉안한 법보종찰이다. 또한 대한불교조계종의 종합도량이기도 하다. 해인사는 802년(애장왕 3)에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 애장왕의 지원을 받아 창건하였다. 해인사 창건 기록인 〈가야산해인사고적기 伽倻山海印寺古籍記〉에 의하면, 순응과 이정은 중국에 가서 보지공(寶誌公) 문하에 불법을 구하였더니, 문도가 지공의 답산기(踏山記)를 주고 아울러 임종 시의 말을 전하였다.
두 사람이 지공의 묘소를 찾아가 법을 청하니 수일 후 지공이 나와 설법을 하고 의발(衣鉢)을 전하며 간곡히 이르되, “너희 나라 우두산 서쪽에 불법이 크게 일어날 곳이 있으니, 너희가 환국하여 절을 창립하라.”하는 말을 들었다. 두 스님이 귀국하여 우두산의 동북쪽으로부터 고개를 넘어 서쪽 골에 이르러 보니, 합당한 곳이 있었으므로 풀을 깔고 앉아 수도하였다.
그때 애장왕후의 등창병을 고쳐주자, 애장왕이 이에 크게 감사하여 먼저 봉서사(鳳棲寺 : 지금의 願堂庵을 말한다 함.)를 세웠다. 그리고 법당과 승료(僧寮) 40여 소를 짓고 전지(田地) 2천5백 결을 하사하였다.
개산일(開山日)은 그 해 8월 16일(고적기에는 10월 16일)로 전한다. 화엄종의 개산조인 의상(義湘)의 법통을 이은 순응은 《화엄경》의 해인삼매(海印三昧)를 인용하여 해인사로 명명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진성여왕이 죽은 애인을 위하여 해인사를 원당(願堂)으로 삼고, 자신도 왕위에서 물러난 뒤 해인사에서 지내다가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고려태조는 후백제와 싸우다 해인사에 들어와 주지 희랑에게 구원을 청하니 희랑이 군을 일으켜 태조를 도와 후백제를 격파하였으므로, 태조가 전답 5백 결을 내려 절을 확장하도록 하였다.
조선 태조는 1398년 강화도에 있던 《고려팔만대장경판》을 한양에 잠시 옮겼다가 뒤에 해인사에 봉안하고 세조는 대장경판각을 확장, 보수하였다. 1488년에는 왕명을 받은 학조(學祖)가 대적광전(大寂光殿)·대장경판각 등을 비롯하여 160여 칸의 건물을 중창하였다.
임진왜란 후 모두 7차례의 화재가 있었으며, 그때마다 중건 또는 중수하였다. 특히, 1817년의 대화재 때는 대장경판각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타버렸다. 그 뒤 제월(霽月)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요 건물로는 큰 법당인 대적광전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명부전·삼성각·응진전(應眞殿)·조사 전(祖師殿)·퇴설당(堆雪堂)·응향각(凝香閣)·관음전·궁현당(窮玄堂)·구광루(九光樓)·경학원·명월당(明月堂)·사운당(四雲堂)·해탈문·국사단(局司壇)·봉황문·일주문(一柱門) 등이 있다.
가야산 내의 부속 사찰과 암자로는 청량사(淸凉寺)·백련암(白蓮庵)·홍제암(弘濟庵)·약수암·원당암(願堂庵)·삼선암(三仙庵)·금선암(金仙庵)·국일암(國一庵)·희랑대(希郎臺)·용탑선원(龍塔禪院)·길상암(吉祥庵)·지족암(知足庵)·보현암(普賢庵) 등 13개 사암(寺庵)이 있다. 또 해인사는 서부 경상남도 지역 합천·거창·산청·함양·진주 등 5개 군의 65개 말사를 거느리고 있다. 또한 해인사에는 여러 국보, 보물이 보존되어 있다.
국보로는 해인사대장경판(국보 1962년 지정)과 해인사장경판전(국보 1962년 지정)이 있다. 그리고 보물로는 해인사석조여래입상(보물 1963년 지정)·반야사원경왕사비(보물 1963년 지정)·해인사원당암다층석탑 및 석등(보물 1970년 지정) 등 3점이 잇다.
이 밖에 여러 사보(寺寶)들도 있다. 상탑향로(象塔香爐)·옥제가 화(玉製假花)·희랑조사자조목상(希郎祖師自彫木像)·오백나한도(五百羅漢圖)·봉황촛대·일영의(日影儀)·순은향로·옥등잔·숙종어필병풍(肅宗御筆屛風)·오채병풍(五彩屛風)·무공수정(無孔水晶) 등 2백 여점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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