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오랜만에 순천군 승주면에 위치한 송광사에서 선암사로 이어지는 청청한 산길을 산행하게 되었다
내가 이 길은 이번으로 꼭 3번째 길로 36년 전인 1987년 과 25년 전인 1998년 그리고 오늘 2023년 1월 14일로
하여 꼭 3번의 이 길을 걸었다 우연이 3번다 송광사에 시작하여 선암사로 넘어가는 코스였다
지금도 기억이 새로운 곳은 이 길은 청청 그대로이다 이끼가 돌과 나무에 서려있고 그리고 죽대나무가 선암사 쪽엔 모두가 다 대나무라 해도 될 정도로 참 죽대나무가 많이 자생하는 곳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3대 승보사찰 송광사가 있는 곳이다
산행초에 송광사에 들러 잠시 참배인사드리고 오늘 산해의 안전을 기원하게 된다
이날 어제 1/14 일 토요일부터 내리는 비는 송광사 입구에서도 안개비는 내린다 하늘은 밝지 않고 어두 침침하다
내가 대중교통을 이용해 5시간 만에 송광사 주차장에 도착하여 산행장비를 점검하고 스틱을 꺼내 길이조정을 한 후
이내 송광소 매표소 (입장료 3,000ㅇ원)에서 입장료를 지불하는데 대구 선상 산악회에서 온 50명 정도의 산행인들과
함께 산을 오르게 되었다
입구부터 이어지는 산길 초행에 상수리 굴참나무 낙엽이 살포시 내려앉아 돌과의 접촉을 피해 준다 조개천 장군봉으로 부터 이어지는 골개천이 어제 내린 비로 물이 넘쳐흘러 겨울인데도 이곳은 여름 같은 물줄기가 시원하다 이러한 자연을 보여
주려고 조개산이 나를 이곳으로 오 개 한 것 같다
산길을 오르며 오르는 개천길과 계곡길 자연이 훼손되지 않아 너무나 기분 좋고 상퀘하다 특이 이산길 코스는 자연이 참 잘 보존된 구역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이 닿지 않고 등산로 주변면 산길을 돌로 다져 이기긴 산길옆 바위에 바닥돌에서 이곳이 순수한 자연을 보게 된다 참 정말 자연이 고스란히 잘 보존된 곳이 이 산길이 아닌가 한다
안개 자욱한 산고개를 오르면서 참 많은 자연의 사진을 촬영하게 된다 이제 안 하면 이런 자연을 다시 만나겠나 싶어서 연거푸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굴모재에 오르니 이곳에 상고대가 피어 더 큰 자연경관을 알게 해 준다
이산길에서 자연 상고대를 만나다니 나는 운이 좋은 것 같다 대구에서 온 산해인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 오르다 보니 굴목제다
사실 이 길은 선암사와 송광사의 스님들이 왕래를 하며 불심에 의지하며 자신을 깨달아 가는 그런 선종의 의미를 부여받은
그런 스님의 고행정진의 길이였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조개사의 장군봉 일대는 멀리서도 상고대를 잘 보개 된다
굴목재의 고도는 약 700m가 된다고 하니 이곳에서 가까운 천진암과의 거리는 2km 정도의 거리에 있다
다만 너무 춥지도 않고 햇빛도 없어 약간은 추위를 살짝 느끼면서도 오르는 내내 이산길의 매력을 곳곳에서 알게 된다
예전 선승들이 걸었던 이 길을 그때 그 기분으로 오른다 생각하니 나도 선승이 된 것 같은 기분으로 한참을 오르고 오르다 굴목재를 기점으로 내리막을 걸어 내려가다 보니 원조 보리밥집 가는 길이란 이정표가 보인다
이산길의 바로 명문 코스는 이 보리밥집이다 36년 전에는 조그만 비닐하우스 한 막에 아주 작은 농막에서 시작했던 이곳이 지금은 산행하는 이들이 식탁에 않아 밥을 먹게 잘 정돈되어 있고 조금 변한 것은 예전에는 보리밥을 큰 밥그릇에 퍼서 바로비비게 하였는데 이제는 공깃밥으로 하여 나오고 나물류도 예전보다는 양이 좀 줄어들었고 보리밭도 좀 작게 나오는 편이다
알고 보니 이보리밥집은 1대 부부가 아들과 딸에게 전수해 지금은 2 대가 함께 보리밥집을 운영한다고 한다 보리밥을 다 먹고 나와 선암사 방향으로 가려는데 이곳에도 몇 년 전까지 보리밥집을 했던 3개의 음식 팔던 데가 폐허로 방치되어 있다
이때 왜 원조라는 말이 들어간 것을 알게 되었다 아마 대부분 사람들이 이산길을 걷다가 이곳 보리밥집서 식사를 하게 된다
선암사로 가려는데 다시 가파른 길이 나와 오르니 이곳이 큰 굴목재라는 푯말이 보인다 이곳 산행 이정 지정목에서 사진을 촬영하고 나는 홀로 대중교통을 염두에 두고 계속 내리막길을 내려 같다 한참을 내려가니 선암사라는 푯말이 보인다 나는 잠시 선암사를 둘러보고 나오며 아치형으로 놓인 석제다리를 감상하며 다리를 건축한 당시의 우리 건축가들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어진다
이무거운 돌을 어찌 쌓아 올려 아치형으로 하고 정교하게 다리를 놓았는지 참 신기하다 걸음을 재촉하며 선암사 버스정류장에 도착하니 오후 3시 50분이다 이내 버스시간을 확인해 보니 오후4시 반에 순천터미널로 가는 버스가 있다고 표시해준다 나는 잠시 스틱을 접어넣고 배낭을 정리하며 정류장 근처를 두리번 거리다 4시반 버스타고 순천터미날로 갔다
이글을 쓰면서 다시한번 더 송광사와 선암사에 대하여 알고 싶어져 인터넷 배과 사전에 들어가 알아보니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송광사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이다. 867년(경문왕 7)에 체징(體澄)이 창건하였다.그 뒤 폐허화되었던 것을 고려 중기의 고승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이곳을 지나다가 영천(靈泉)의 물을 마신 뒤, 영천으로 인하여 뒷날에 큰 절을 세울 수 있는 곳이라 판단하여 샘 주위에 돌을 쌓아두었다가 제자를 시켜 뒷날 그 자리에 절을 중창하도록 당부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 뜻을 실천에 옮기지 못하다가 1622년(광해군 14)에 응호(應浩)·승명(勝明)·운정(雲淨)·덕림(德林)·득순(得淳)·홍신(弘信) 등이 이극룡(李克龍)의 시주를 얻어서 중창하였다. 중창 후 벽암(碧巖)을 초빙하여 50일 동안 화엄법회를 열었는데, 이 때 전국에서 수 천인이 모여서 시주하였다.
이로써 1636년(인조 14)에 각성(覺性)이 약사전과 칠성각을 중창하기까지 계속 큰 불사를 벌여 대가람을 이룩하였다. 당시 대웅전은 2층 건물이었고 일주문은 절 남쪽 3㎞ 지점에 있는 만수교 앞에 세워졌다고 한다. 그 뒤 1813년(순조 13) 정준이 관음전을 중수하고 대웅전을 단층으로 개축하였다.
1814년 약사전을 중수하였고, 1934년 극인(克仁)이 나한전을 중수하였다. 1993년에는 대웅전 삼존불상을 개금하였는데, 이때 다수의 복장(腹藏) 유물이 나왔다. 1996년 포교당을 지었고, 1998년 지장전과 오층석탑을 세웠다. 1999년에는 석조 미륵대불입상을 봉안하고 첨성각과 옛 명부전을 이건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지장전·오백나한전·약사전·관음전·삼성각·십자각·천왕문·금강문·일주문 등이 있다. 이 중 1996년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은 1857년(철종 8)에 제봉(齊峰)이 건립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 팔작지붕이며, 조선 후기 건축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이고 있다.
대웅전 안에는 1974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석가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벽과 천장에는 선이 매우 활달하여 생동감을 가지게 하는 19세기 작품 비천(飛天)이 그려져 있다. 또, 십자각은 1971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는데, 십자각이라는 이름은 건물의 평면구성이 十자 모양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12개의 기둥을 사용하여 2층 누각형태를 갖춘 건물로서 고건축물 중에서 찾아보기 드문 예이다. 이 십자각 내에는 1716년(숙종 42)에 주조한 범종·법고(法鼓)·목어(木魚) 등이 있다.
일주문은 원래 만수교 앞에 있던 것을 1814년(순조 14)에 조계교(曹溪橋)가 있었던 곳으로 옮겼다가 1944년에 극인(克仁)이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으며, 1971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 밖에도 절 입구 동쪽에는 벽암·호일(虎一)·자수(子秀)·유문(有文)·자찰(自察)·서봉(西峰)·성심(性心)·한계(寒溪) 등 고승 20인의 부도가 있다. 또, 1636년에 신익성(申翊聖)이 찬한 송광사개창비를 비롯하여 목각칠층다보탑판(木刻七層多寶塔版)·조계교비·석조(石槽) 등이 있다.
선암사
542년(진흥왕 3)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처음으로 개창하여 비로암(毘盧庵)이라고 하였다고 하나 이것을 그대로 믿기 어렵다. 875년(헌강왕 1)에 도선(道詵)이 창건하여 선암사라고 하였다는 설이 더 신빙성이 있다.
박전지(朴全之)가 쓴 「영봉산용암사중창기(靈鳳山龍巖寺重創記)」에 지리산 성모천왕(聖母天王)이 “만일 세개의 암사(巖寺)를 창건하면 삼한이 합하여 한 나라가 되고 전쟁이 저절로 종식될 것이다.”라고 한 말을 따라 도선이 세 암자를 창건하였는데, 곧 선암(仙巖)·운암(雲巖)·용암(龍巖)이 그것이라고 했다.
절 서쪽에 높이가 10여 장(丈)되는 면이 평평한 큰 돌이 있는데 사람들은 옛 선인(仙人)이 바둑을 두던 곳이라고 하며, 이 때문에 선암이라는 절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1088년(선종 5) 의천(義天)이 중창하였으며 선암사에 의천의 영정이 있는 까닭은 이러한 인연 때문이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석종(石鍾)·철불(鐵佛)·보탑(寶塔)·부도(浮屠)·문수전(文殊殿)·조계문(曹溪門)·청치(圊廁) 등은 다행히 화를 면하고 나머지 건물은 모두 병화에 소실되었다. 정유재란에 불타기 이전의 선암사에는 수많은 건물이 있었다.
법당을 중심으로 하여 그 동쪽에 명부전(冥府殿)·약사전(藥師殿)·적연당(寂然堂)·명경당(明鏡堂)·대장전(大藏殿)·청운당(靑雲堂)·백운당(白雲堂)·배면당(背面堂)·독락당(獨樂堂) 등이 있었고, 그 서쪽에는 미타전(彌陀殿)·무집당(霧集堂)·영풍루(迎風樓)·천장전(天藏殿)·지장전(地藏殿)·문수전·보현전(普賢殿)·용화당(龍華堂)·만월당(滿月堂)·반선각(伴仙閣)·제운료(際雲寮)·낙성료(落星寮)·서하당(栖霞堂)·성행당(省行堂)·탕자방(湯子房)·청치 등이 있었다.
그 앞으로는 정문·종각·대루(大樓)·조계문 등이, 그리고 그 뒤쪽에는 첨성각(瞻星閣)·국사전(國師殿)·오십전(五十殿)·응진당(應眞堂)·팔상전(八相殿)·원통전(圓通殿)·능인전(能仁殿)·원명각(圓明閣)·성적당(惺寂堂)·진의각(眞疑閣)·활연당(豁然堂)·적조당(寂照堂)·심주각(尋珠閣)·완월당(玩月堂) 등이 있었다. 1660년(현종 1)에 경준(敬俊)·경잠(敬岑)·문정(文正) 등 세 대덕이 중건하였고, 그 뒤에 침굉(枕肱)이 많은 당우(堂宇)들을 보수하였다.
특히 침굉은 선암사에서의 규범을 엄하게 하였다. 해마다 제석(除夕)이면 승려들이 동서로 패를 나누어 술을 마시며 노는 일이 있었는데, 이를 금하고 염불로써 밤을 새우도록 승려들의 금계(禁戒)를 엄하게 하였던 것이다. 침굉의 문인에는 호암(護岩)과 치현(致玄)이 있었다.
특히 호암은 『법화경』을 염송하는 것으로 수행을 삼았으며, 사찰의 중수에 부지런하였다. 1699년(숙종 25)을 전후한 시기에 원통각(圓通閣)·약선궁(若仙宮)·대법당·오십전 등을 새로이 건설하고, 관음상 1구, 소상(塑像) 61구, 화상(畵像) 등을 새로이 조성하였다.
1704년에는 호연(浩然)이 『선암사사적(仙巖寺事蹟)』을 썼다. 1819년(순조 19) 봄에 불이 나자 곧 상월(霜月)이 중건하였고, 1823년에 또 다시 불이 나자 그 이듬해에 해붕(海鵬)·눌암(訥庵)·월파(月波)가 대규모의 중수불사를 이룩하였다.
1911년 6월 3일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사찰령(寺刹令)」이 발표되고, 다시 같은 해 7월 8일 반포된 「사찰령시행규칙」에 따라 30본사가 정해질 때, 선암사 또한 30본사 중의 하나가 되어 승주군과 여수시·여천군의 말사를 통섭하였다.
'산!산!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광산 산행과 장안사 20230204 (0) | 2023.02.08 |
---|---|
지리산 바래봉 산행 20230205 (0) | 2023.02.06 |
주왕산 산행 20230107 (0) | 2023.01.10 |
경주 남산 역사 기행 산행 2 (삼릉에서~ 금오봉 ~ 약수골 ) 20230101 (2) | 2023.01.02 |
토함산 산행 20230101 (0) | 2023.0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