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남산은 지붕없는 불교미술 박물관이라 한다 신라시대 서민층이 신앙심이 강력하게 받들던곳 이곳 을 2022년 12월에
찿아보고 우리불교의 오랜 실상을 더보고 싶어 새해 년초 이곳 남산을 2번째 찿아왔다 가는곳 마다 불교불상과 절터인 사지가 이번 코스에는 유난이 많이 보인다
아쉬운것은 모든 불상의 머리 두부 부분이 파손되어 잘려지고 훼손한것을 보면서 불자의 한사람으로 안탑갑고 개탄 스럽다 왜 하필 머리부분만 이렇게 잘라버리거나 크게 훼손 하였는지 참 아이러니 하다 신라시대에 이곳에는 남산은 불교국
불국토 세사이엇을 것이다
산 중간 중간의 큰바위와 작은바위 여기 저기 새겨지거나 조각된 마애불과 선가불 입불상,석불좌상등 그야말로 이계곡
저계곡에 우리 민간불교의 위세가 컷 씀을 단숨해 알아차리게 된다 그래서 지난번 이어 2번에 걸쳐 이곳 남산을 찿게되었다 이번 2차에도 남산 불교전부를 볼수없어 언젠가 다시 이곳을 찿아 와야 될듯하다
이번 방문에서는 특히 삼릉계곡 선가육존불이 인상에 남는 다 6분의 부처님을 돌의 선각으로 다듬어 흐릿하면서도 나름대로 행태를 알게해준 선각조각들이 정말 자연스런 흐름을 타고 바위에 선각되아있다 그리고 오른도중 사지터라는 안내판이 참 많기도 하다
중간능선쯤 오르자 삼릉계곡 불좌상이 나왓는데 규묘도 큰 부처님이 어떻게 이런 산중 중턱에 남아 있는지 원래 원불상은 국립중앙 박물관에 모셔져 있다한다 그리고 지금의 것은 후에 조각된 불상이라고 한다 절터가 크지 않음에도 주변 바위와 암조각들이 병풍처럼 얼켜져 있는 지금의 남산은 당시의 시대상을 알게 해준다
한참을 오르다 보니 상선암이라는 작은암자가 나오고 알고보니 이암자도 오래전 고려이후 조선으로 이어져온 절터였다고 하는곳에 상선암이라는 절이 있고 젊은비구스님이 관리하고 게신다 오르는 도중 물을 먹고 싶어 전기포트에서 물한컵을 받아머고 스님에게 인사드렸다 그리고 커피도 비치하여 산을 오르는 이들에게 대중보시도 하고 계신다
이암자를 보는 순간 작년 2022년 4월 밀양으로내려가는 운문산아주 높은곳에 상운암이라는 암자가 생각나 비교해보니 그곳은 높이가 900m dlsep dlrhtdms 500ㅡ 정도이고 규묘도 이곳 상선암이 조금 큰 사찰인듯 하다 그래도 이높은 봉우리에
물을 자연수로 얻을 수 있다하니 참 다행이다 마침 스님은 수도관이 얼었는지 수도관을 흔들며 동파에 대피하고 계신다
오직 불심 하니로 이곳 암자에 계시는 비구 스님을 생각하니 내삶이 얼마나 행복하고 포근한지를 알것 같다 수도자로서 높은산에 혼자 기거하시며 오직 불심으로 온갖 고행을 이겨 내시니 이비구스님이 야 말로 이시대의 살아계신 부처님같은 존재가 아닌가 하여 사믓 내자신이 숙연해 진다
등산로가 이 상선암 중간을 통과하게 되어 있고 그 중심옆에 예전 사지가 있었다는 돌조각에 선각이 약간 보이는데 이것을 설명해 주는 안내판이 있다 이상선암도 예전에는 분명 사찰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뒤 바위에 역시 불상이 조각된 부처님 마애 석상이 있다
이어오르니 바둑바위와 냉각암이 나온다 이곳에 오라서니 세찬 바람이 크게 불고 몸이 추어진다 이때 시간이 오후4시가 다되어 오니 나는 서둘러 금오봉으로 올라가 정상에서 기념 사진을 셀프 촬영하고 이내 가까운 거리인 약수골 하산 (1.5km) 로 거리가 짧아 이곳으로 하산 하였다
하산길에 제법 큰 규모의 약수골 마애입상불상이 나왔다 이곳도 머리부분이이 없어 참 안타까움이 앞선다 왜 하필 머리만을 잘라 버렸는지 지금도 이런 행위를 한자는 아마 사후셰게에서 부처님을 욕되고 파괴한죄로 큰 고통의 바다를 지금도 건너고 있다 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부분의 머리도 빨리 복원시켜 놓았음 한다
입상불상을 하산길에 사람이 없어 홀로 감삼하고 내려오니 작은 대나무가 나오며 절터가가 문화재 발굴하는지 축대와 절터 대웅전 자리를 많이 파내고 한 흔적이 보인다 예전에는 이곳도 당시에는 큰 규모의 절터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 있던 탐하단과돌 그리고 석가여래 석불이 머리가 자라진체 보호하고 있다
이어서 작은개울을 건너 내려오니 이곳에도 과거 절터였다는 안내판이 3곳정도 나온다 홀로 오후 5시 이 약수골로 내려오면서 이곳ㄷ도 예전에는 많은 불자들이 이길을 오가며 불심을 불살렸으리라 생각하니 페허된 지금의 사지가 잘 복원되기를 기원해 본다 이처럼 약수골도 많은 불교유적이 참 많이도 있다
이어 개울길옆을 죽 내려오니 우측에 교도소가 있으니 접근하지말라는 경고판이 나오고 한참을 내려오니 버스 타는 정류장이 나온다 정류장 뒤에 원성제라는 사당이 나온다 꾀 규모가 큰 현대 한옥으로 지어진 박씨 사제라는 안내판이 나온다 잠시35분정 도를 기다리니 500번 시내버스가 다가오고 이때 시간이 오후 5시반이라 주변이 컴컴해져 온다
이글을 쓰면서 삼릉과 삼릉게곡 사적지에 대해 궁금해 인터넷 배과사전에 찿아보니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삼릉
사적 제219호. 남산(南山)의 서쪽에 동서로 세 왕릉이 나란히 있어 ‘삼릉’이라 불리고 있다. 서쪽으로부터 각각 신라 제8대 아달라이사금, 제53대 신덕왕, 제54대 경명왕 등 박씨 3왕의 능으로 전하고 있다.
아달라이사금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왕릉소재에 대한 기록이 없다. 아달라이사금의 원손(遠孫)인 신덕왕은 『삼국
사기』에서는 죽성(竹城)에 장사지냈다고 하고, 『삼국유사』에서는 화장해 잠현(箴峴) 남쪽에 묻었다고 하였다.
또, 신덕왕의 태자로서 왕위를 이은 경명왕은 『삼국사기』에서는 황복사(黃福寺)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하고, 『삼국유사』에서는 황복사에서 화장해 성등잉산(省等仍山) 서쪽에 산골(散骨)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신덕왕릉이나 경명왕릉의 위치는 불분명한 상태이고, 게다가 신라 초기의 아달라이사금과 700여 년이나 시간적 간격이 있는 하대 신덕왕과 경명왕의 능이 한 곳에 모여 있다고 보기도 어려워서 이 삼릉이 앞의 세 왕의 능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세 고분 모두 외형은 원형봉토분으로 통일신라시대 왕릉의 규모와 비슷하나 아무런 장식이나 석조물이 없고, 현재 놓여 있는 3개의 상석도 모두 최근에 만들어놓은 것이다.
전(傳) 신덕왕릉은 1935년과 1963년 두 차례에 걸친 도굴을 계기로 내부가 조사되었다. 내부구조는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인 굴식 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서 평면은 사각형에 가깝고, 궁륭형(穹窿形) 천장으로 되어 있는 널방은 자연괴석(自然塊石)으로 축조되었다.
널방의 남벽 가운데는 널길이 달렸고 널방과 널길 사이는 판석(板石) 2매로 된 널문으로 막았다. 널방 각 벽면의 길이는 3.04∼3.09m이고, 널방 바닥에서 천장 뚜껑돌까지의 높이는 3.91m이다. 널길은 전체 길이 2.2m, 너비 1.2m이다.
널방 바닥 가운데에는 자연석으로 높이 35㎝의 방형축대를 쌓고 그 위에 두께 5㎝ 가량의 판석 2개를 남북으로 놓아 주검받침을 만들었다. 따라서 이 고분은 두 사람의 시신이 동서방향으로 봉안된 어울무덤[合葬墓]이라 할 수 있다. 널방과 널길의 모든 벽면과 천장 그리고 주검받침의 측면에는 석회를 두껍게 발랐다.
이 고분에서 가장 주목되는 점은 북벽과 동서 양벽의 일부에 연속해 마치 병풍을 돌려세운 것처럼 채색된 벽화가 있는 것이
다. 입구에서 볼 때, 정면인 북쪽 벽면에 6폭, 그리고 그 좌우로 연속해 동서 벽면에 각각 3폭씩 모두 12폭으로 된 채색면이 있다.
높이는 1.4m이며 이를 다시 각 폭마다 상하로 양분해 모두 24면으로 구분하였다. 24면의 각 면에는 다른 문양이나 그림은 없이 주(朱)·황(黃)·백(白)·군청(群靑)·감청(紺靑) 등 5색으로 구별해 순서 없이 배색하였다.
고분의 벽화는 단순한 채색면에 지나지 않지만 벽화자료가 거의 없는 신라고분에서는 주목되는 자료이다. 더욱이 경주 일원의 신라고분에서는 지금까지 확인된 유일한 채색벽화로서 중요하다. 이 벽화가 의미하는 내용을 확실히는 알 수 없다.
그러나 5색은 오행설(五行說) 혹은 그와 결부된 방위신사상(方位神思想)과 관련이 있을 것이고, 그림의 너비가 12폭이라는 것도 12지신(十二支神)의 사상과 관련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