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코스: 지하철 1호 산 부산대역 10:30 1번 출구 → 부산대 캠버스 운행 7번 마을버스 →
부산대 미술관 정류장 하차 → 부산대경암체육관과 제2사범관 중간통로 등산로 선택 →
돌탑이 아주 많은 아름다운 도탑길능선 → 2 망루 (제봉) → 금정산 남문 → 대륙봉 →
동문→ 제4망루 → 원효봉 → 북문 → 북문통과범어사방향으로 나오자마자 → 고담봉 오르는→
고당봉 오르는 능선길 중간에서 우측 길 → 쪽대나광장 → 큰 대나무길 → 범어사 뒤편 길 →
청련암 참배 → 제배 고개 → 계명산 정상 → 경동 어파트 106동 뒤 → 범어사역까지 걸어서 감
총 8시간 소요 총 18km
일전(2020213)에 양산역에서 시작하여 고당봉을 거처 북문 남문깢지 산행을 했었다 그때 동문으로
너무 늦은 시간 오후 18:50에 내려오게 되며 조금 어두운 환경에서 금정 산성길을 걸었다가 오늘은
그 반대 역으로 금정산 남문에서 시작하여 금정산성을 걷고 싶었다 그러니까 일전에 걸었던 코스와
정반대로 산행코스를 잡아 걷게 되었다
일단 부산지하철 1호선 부산대역에서 하차하여 1번 출구로 나오니 부산대학 캠버스 내를 오가는 7번 버스가
7명 정도의 사람을 태우고 출발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나는 얼른 차에 오르며 초행길이라 운전기사님에게
부산대 미술 정류 자유 경유를 물어보고 차에 올랐다 이때 시간이 오전 10시 반이 지나고 있다
차는 이내 몇 정거장을 오르더니 부산 대안으로 들어간다 생각보 대부 산대 캠퍼스는 넓고 건물이 참 많이
보인다 다만 토용일이라 학생은 그리 많이 안 보여 부산 대역서 10분도 안 걸려 미술정루장에 닿는다
차에서 내려 잠시 둘러보다가 초행이라 배낭을 매고 오르는 70대 중반 분에게 남문으로 가는 코스가 어딘지를
물으니 길안내를 해준다
나는 그분 안내대로 제2망루 동제봉으로 오르는 암릉길을 택했다 자 연돌 탐이 많은 이곳은 오르는대로
돌탑이 무수히도 많다 자연으로으로 빗어진 것이라 너무 아름답고 황홀하다 이런 길이 도심 한복판에
있다는 것이 미끼지 않듯 않다 그리고 이 길은 등산인이 자주 안 다니는 곳인지 그런대로 홀로 나 혼자 이 길을
걸어 올라가고 있다
자연 돌탑 이것을 토루 하는데 수천 년 전에 흙속에 있던 돌이 침식하면서 이러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하고
특히 이곳 부산 금정산과 주변 산들에 이러한 것들이 많이 분포하고 있다고 한다 하도 신기하고 멋진 자 연돌 탐이
많아 수차례 사진을 찍어야만 했다 그리고 이런 돌타빌을 언제 다시 올가를 생각하며 돌 탐에 감동하며 산길을
재촉하며 와보니 거의 1시간 반의 이길 약 1.5km 정도의 길을 올랐다
이길 능선에 오르니 커다란 임도가 나와 지나가는 등산인에 물으니 우측으로 가면 남문이라 하여 10여분을
올라가니 남문이 나온다 아담한 석벽으로 쌓아 오린 위에 별로 크지는 안지만 아담한 동문이 더 아름답게만 느껴
진다 마침 이곳에 올라오니 부산의 어느 산악회에서 와서 2022년 산신제를 남녀 등산인 20여 명이 모여 올리고
있다 지금은 산악회를 코로나로 못 나가는데 이곳에 와서 과거 산신제를 대행하는 듯하다
산신제 광경을 잠시 구경하다가 이내 나는 동문 방향으로 걷기를 시작했다 동문으로 가는 중간에 대륙붕이라는 곳을
지나며 사진을 촬영하고 내가 부산대에서 올랐던 자연 돌탑이 어우러진 멋진 능선길을 돌아보니 멀리서 보아도
아기 자기한 돌들이 너무 멋있게 뽐내고 있다
이어 대륙봉을 뒤로하고 작은 내리막길을 걷고 걸으니 이내 금정산 산성마을로 들어가는 아치형 산성 문 위를 걷게 된다
일전에 동문으로 내려와 동문 산성 마을에서 203번 버스를 타고 이산 성문을 통과 한지라 낯이 익어진 모습이다
그리고 계속 오르고 내 리닌 동문이다
동문에서 잠시 쉬려다 이내 북문 방향으로 한참을 걸어 오르니 우측에 산중 약수터가 나와 목이 말라 이곳에서 약수 한 바가지를 먹고 나니 목도 마음도 너무 시원해진다 산에 물을 가지고 안 다니어서 산중의 약수가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이내 물을 먹고 근처 암 지대 바위 옆에서 집에서 가지고 간 삶은 고구마와 계란 땅콩 10개 정도를 먹고 나니 배가 부른다
ㅈ이때 시간을 보니 오후 2시다 좀 늧은시간의 점심이라 맛있고 맛있다 나는 다시 짐을 챙겨 걷고 걸어 드디어 제4망루가 보이는 언덕까지 오게 되었는데 멀리 서쪽으로 고담봉이 우뚝 솟은 저 멀리 앞산과 그리고 내가 걷는 우측으로 산세와 암릉 등이 너무나 아름답고 지난번 컴컴한 어둠에서 보다 맑은 날 아능선을 구경하고 느긋하게 북문으로 행했다
북문에 도착하니 광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벤치에 않아 식사와 쉬는 모습이 많았다 잠시 쉬려다 오늘 계획한
계명봉을 가기 위해 이내 서둘러 북문에서 법어 사방면으로 나가 북문을 싸고 우측으로 오르는 길을 따라
오르는데 이곳은 습기가 있어서인지 먼지가 나지 않아 좋다
한참을 내려가니 커다란 돌들이 무더기로 나오는 암릉 지대를 거니니 이번에 다시 때죽이 집단으로 서식하는 곳을 길 양옆으로 통과하게 되는데 참 때죽이 푸릇푸릇 키가 작은 것들이 참 많이도 모여 있다 이어 다시 조금 더 내려가니 큰 대나무가 나오며 우측에 이곳은 스님들이 기도하는 곳이니 출입하지 말라는 경고의 글 안내판이 있어 좌측 길로 틀어 내려가니
사찰 저수조가 나오고 접근하지 못하게 전기 철책선이 쳐져있다
나는 조심조심 이곳을 톡과 하여 나오니 청련암이라는 암자가 나타나 들어가 참배하고 보니 많은 분들이 이곳에 와서 기도하고 계신다 이곳은 아마도 지장보살 관련 사칠인 듯 지장보살을 외우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온다 나는 경내로 들어가 보니 사찰에서 보기 드문 해태상 큰 것이 여기저기 보이고 그리고 그곳을 지나 위로 오르니 이 세상의 부처님을 다 모셔 놓았는지 사각 제단 같은 곳에 모든 부처님 상들이 가득하다 이러한 사찰은 이곳에서 처음 보는 것 같다
사찰을 들어가 사각 제단을 잠시 돌아보며 내가 예전 다른 사찰에서 간혹 뵙던 부처님들이 다 이곳에 모여 있는 듯 참
많은 부처님이 제단 위에 가득하시다 다시 한번 두 손 모아 이들 부처님께 감사하고 나와 나는 제배 고개라는 곳을 가서 내가 오늘 마지막 목표로 했던 계명봉 632m을 오르기 위해 시간을 살펴보니 오후 5시 10분 지나고 있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계명봉을 오르고 하산하리라 하는 마음으로 오르는 걸음을 재촉하며 쉬지 않고 오르는데 왜 그리
바람은 세차게 불어대고 춥던지 가방에서 두꺼운 겨울 외투를 꺼내 입고 오르고 오르니 땀이 조금 나고 30분이 되어 정상에 올랐다 이미 해는 지기 위해 노을이 들기 시작한다
마침 이때 양산에서 오셨다 하는 70대 초반 어른 산행인과 반가운 인사를 하며 계명봉 증명사진을 번갈아 찍어드렸다
이은 잠시 버버사 방향으로 하산하신다 한다 나는 경동아파트로 가기로 잠시 만남을 뒤로하고 경동 아파트 방향으로 내려가 닌 게 명봉 중봉 525m라는 표시가 되어있는 컴 글 제목을 보고 이내 경동아파트를 방향으로 내려오니 오늘 하루 종일 걸어서인지 뒷장 단지가 결려온다
잠시 내려오니 봉수대라는 표지석이 있고 제단 비슷하게 원형으로 조성해 놓은 봉수대를 구경하고 이네 내려오니
산길이 어두워 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가는 곳 여기저기 표시에 고당봉까지 5km라는 이정 표시가 보인다 그러니까 계명봉 중간중간에 고당봉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참 많기도 하다
한참을 내려오니 경동아파트 106동이 보인다 그리고 여기로 나오니 법어사 가는 버스길도 나타난다 나는 버스를 타지 않고 이내 경동아파트 동측 측면 아파트 옆길을 이용해 범어사역까지 걸어갔다 일전에 한번 왔던 길이라 익숙해져
곧바로 범어사 역에 도착하니 오후 6시 50분이다 오늘 비록 역에서 역으로 이어지는 길을 지하철만 타고 금정 산성길을
대낮에 많이도 걸었다
이 글을 쓰면서 금정산과 계명산에 대하여 더 알고 싶어 인터넷 백과사전에 들어가 찾아보니 다음과 같이 기술
하고 있다
금정산성
돌로 쌓은 산성으로, 낙동강 하구와 동래 일대가 내려다 보이는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뒤 국방을 튼튼히 하고 바다를 지킬 목적으로 다시 쌓았다. 성벽은 17㎞ 정도인데, 해발 801m의 금정산 꼭대기에서 서남쪽으로 계곡을 따라 축조되었으며, 동서남북 4곳의 성문과 수구문, 암문 등이 있다. 산성의 크기나 축성 방법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축성과 수축, 개축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산성은 1667년(현종 8)에 통제사 이지형(李枝馨)이 금정산성의 보수를 건의한 것으로 보아, 이전에 이미 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증보 문헌 비고』에는 1701년(숙종 27)∼1703년에 쌓았으며, 성벽의 둘레는 9,011보, 높이가 15척으로, 사방에 성문이 있었다고 하였다. 또한 1740년(영조 16)에 발간된『동래부지(東萊府誌)』관해 및 성 곽조에는 1707년에 동래부사 한배하(韓配夏)가 너무 넓기에 남북으로 두 구역을 구분하는 중성(中城)을 쌓고 좌기청(座起廳)·내동헌(內東軒) 등의 관아 건물과 장대(將臺), 중군 소(中軍所), 교련청(敎鍊廳), 군기고(軍器庫), 화약고(火藥庫), 승장 소(僧將所), 산성 창(山城倉) 등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뒤 1806년(순조 6)에는 동래부사 오한원(吳翰源)이 중수하고 동문을 신축하였으며, 서문·남문·북문에 문루를 만들고는 수비군을 배치하였다. 당시 성벽의 길이는 32리였으며, 산성 수비는 동래부사가 맡았다고 한다.
1872년(고종 9)에 제작된 규장각 소장「금정산 성진 지도(金井山城鎭地圖)」에는 장대가 동서남북 4곳의 대문과 국청사 뒤쪽에 1곳씩 있고, 본성과 중성에 각각 10곳과 2곳 등 총 12곳의 망대(望臺)가 있었으며, 그 밖에 수문 3곳, 중성 석문 1곳, 아문(亞門) 1곳 등의 성내 시설물이 자리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숙종 이래로 산성 수축 공사의 경위를 새긴 금정산 성부 설비(金井山城復設碑)가 현재 남아 있다.
성벽의 몸체인 체성벽에서 성벽 위 여장(女墻)의 기초석인 미석(眉石)까지는 높이가 낮은 곳이 표토에서 1.5m이고 높은 곳은 1.8∼2.1m이다. 미석은 두께 10㎝ 내외의 판석을 사용하였는데, 20㎝ 정도 돌출시켜 설치하였다. 여장은 20∼80㎝ 정도 높이로 남아 있으며, 동문터 주변의 복원된 부분은 높이가 90㎝에 이른다. 가장 높게 남아 있는 북쪽 벽 일부는 안쪽 벽 바닥에서 여장 윗부분까지의 높이가 1.2m여서, 조선시대 여느 성곽의 여장 높이와 같다. 다만 바깥벽 미석을 기준으로 하면 높이가 80㎝이며, 특히 미륵암 북쪽 암반 주변에는 약 1m 정도의 성벽도 남아 있다. 따라서 여장을 포함한 성벽의 높이는 원래 3m 전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돈대(墩臺)로 추정되는 제3망루 남쪽과 일부 구간에서만 여장에 총안(銃眼)이 설치되어 있어, 여장은 특수한 곳만 설치되었거나 복원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2004년에 실시된 죽전마을 금성동 일대 시굴조사에서는 높이 30∼80㎝, 너비 70∼80㎝, 석축 2∼4단이 잔존하는 동서 5.6m, 남북 2.4m 규모의 석축 담장 유구가 총 8m가량 확인되었는데, 고지도에 있는 금정진의 외곽 담장으로 추정된다.
체성벽은 기저부에서 높이 1.5m 까지는 길이 0.8∼1.1m, 두께 25∼70㎝ 크기의 큰 깬돌과 조그마한 돌을 이용하여 쌓았으며, 그 위로에는 길이 30∼50㎝, 두께 15∼30㎝ 크기의 납작한 깬돌〔板狀割石〕과 조그마한 돌을 쌓았다. 성벽에 사용된 돌은 금정산의 화강암반을 사용하였기에 구간별로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중성 벽은 길이 0.4∼1.2m, 두께 50∼70㎝ 크기의 비교적 큰 돌을 사용하여 쌓았는데, 부산 주변 수군 진성(水軍陣城)의 성벽처럼 큰 깬돌 사이로 조그마한 돌을 끼워가며 세워쌓기 한 수법도 보인다. 또한 아문(亞門) 주변의 성 바깥벽 및 남문 동쪽 벽에서는 약 5m 구간마다 수직 줄눈이 보여, 일정한 구간별로 순차적으로 성벽을 축조해 나갔던 것 같다. 경사면 성벽 윗부분에서는 2.1∼3m 간격으로 체성벽과 직각으로 교차하는 성벽이 곳곳에서 확인되어, 2∼3m 구간마다 계단식으로 축대를 덧붙여 쌓아 성벽의 안정성을 높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벽에 사용된 돌은 대부분 주변의 자연 암반에서 떼어낸 화강암제의 납작한 깬돌이며, 제4망루와 동성벽 사이, 문 터 주변, 중성벽은 비교적 큰 네모난 깬돌이 사용되었다. 이들 구간은 평평한 편으로 방어에 취약하기에, 주로 동래쪽 성벽에 큰 돌을 사용하여 보다 견고하게 축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중성벽의 너비는 3.5m 내외인데, 대부분 바깥쪽은 큰 돌로 쌓고 안쪽은 작은 돌로 채운 내탁식(內托式)으로 축조되어, 바깥벽에서 1.1∼2.1m 안쪽까지는 막돌로 채웠으며, 그 안쪽은 흙으로 뒷채움을 하였다. 한편 문터 주변과 경사지에서는 안쪽 벽의 안쪽을 따라 자연 배수가 되도록 한 너비 5∼15m, 깊이 5m 정도의 ‘V’ 자형 도랑〔溝〕이 확인되는데 내황(內隍)으로 보인다. 또한 동성벽과 북성벽에서는 활 모양〔弧形〕의 치상(雉狀) 유구가 다수 확인되었는데, 외견상 둥근 모양의 치 같기도 하지만, 성벽 윗부분이 훼손된 바깥벽 기저부에 덧붙여 축조한 것으로 후대에 성벽을 보강하거나 보수할 때 쌓은 것으로 보인다.
금정산성은 축성 과정과 역사적 변천 과정을 명확히 확인할 수 있는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산성이자, 동래읍성(東萊邑城)과 함께 부산 지역의 대표적인 조선시대 산성으로 평가되고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조선시대 국방사 연구와 해안 관방 체계 연구에 중요한 가치를 지닌 산성이다.
계명봉
계명봉(鷄鳴峰)은 과거 독립된 산으로 인식되어 계명산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금정산의 동쪽에 위치해 새벽이 가장 먼저 찾아온다고 하여 계명(鷄鳴)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계명은 불교적 용어로, 기도를 올릴 때 맑은 날은 별이 시간을 알리지만, 흐린 날은 하늘에서 들리는 닭 울음소리가 새벽을 알린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계명봉은 금정산의 동남쪽 방향에 위치하고 있으며, 범어사의 맞은편 동쪽으로 뾰족하게 돌출해 있다. 계명봉의 산록을 구성하고 있는 지질은 안산암질 암류로, 범어사 계곡을 기점으로 하여 북동 방향으로 비교적 길게 분포하고 있다.
해발 601.5m인 계명봉의 가장 낮은 동쪽 봉우리에는 금정산에서 유일하게 설치된 봉수대가 있었으며, 사방으로 탁 틔어 경관이 뛰어나다. 범어사 주변 계곡인 범어천과 물망골을 중심으로 야생 차나무가 서식하고 있다. 또한 부산광역시의 최대 사찰인 범어사가 있다. 낙동강과 온천천, 수영강 분수계의 중심에 해당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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