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은사지는 경주시에서 동해안바닷가로 가다가 나타나는 신라문무왕이 발원하다가 완성을 못하고 아는 신문왕이
완성하였다는 부모님 업적을 기리고져 아들이 효업으로 은헤를 갑고져 지어졌다는 지금은 터만 남았고 3층 쌍 석탑이 남아있는 에전 절터이다
경주시내에서 83번을 타고 이곳 감은사지앞 정류장 까지 경주시내버스로 1시간이 걸리는 위치에 있는 사찰터이다
시내버스는 경주시내를 벗어나 시골길을 달리고 저수지옆으로 한참을 달리고 들판길을 쉼없이 한참을 가야 만나는 곳이다 이곳은 경주시내와 멀리 떨어져 있어 쉽게 오지않게 되는곳 중의 하나이다
감은사지는 문무대왕의 업적을 기리며 부모은혜를 갚고져 신라31대 대왕 신문왕이 완성하였다 하고 신라시대에서
동해 바다로 부터 왜적들이 침투하여 주민을 약탈하고 영토침강을 하여 문무대왕이 내가 죽거던 대왕암에 묻어주고
죽어서라도 바다에서 왜구들을 물리 치겠다고 하는 문무대왕의 액국 충정이 서려있는 곳이다
한참 을 달려 감은사지 정류장에 내려 마을 안길로 들어서서 나는 감은서지 서쪽에서 들어가 동쪽으로 나왔다
비록 사찰터만 남아있지만 3층 쌍탑이 있고 금당터와 강당터등 당시 절의 규모를 주출돌과 주변의 환경으로밖에
볼수가 없으니 한편으로는 참 아쉬움이 많은 고찰터임에는 분명하다
정류장에서 내려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 마을 집 근처에서 80이 넘어 보이는 여인이 작은 애들 끌차에 농사물 도구를
싣고 옆을 지나가는데 꼭 시골 어머님을 만나는 느낌이 들어 말없이 한참을 바라보다가 감은사지 터로 들어섰다
감은사지터 석탑 주변에 초등생으로 보이는 어린이가 자기부모인듯한 분에게 탐의 구조에 대해 설명하는 하도
설명을 잘하기에 잠시멈추어 한참을 경청한후에 발길을 돌리게 된다
3층 석탑 바로 뒤에는 금당터가 있는데 특이하게 탐을 바치는 횡 석주밑에 굴로 인정하게할 통로가 보였는데
이것이 문무대왕 혼이 이곳에 들러 지나다니는 통로였다고 안내문에는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뒤에는 강당터와
넓은 대지터가 있어 이곳의 예전 사찰의 규모를 짐작하게 된다
그리고 한바퀴 절터를 돌고나니 저녁노을이 감은사지에 내려 않는다 이때시간이 오후 5시가 다 되었다 조금 일찍 이곳에 도착하여 감은사지 뒤 뒷산 능선에 올라 동해바다와 문무대왕릉을 보려 했던 계획을 취소하고 나는 이내 발길을 돌려 1시간전 내린 감은사지 버스정류장으로가니 이떼 시간이 오후 6시 10분이다 경주시네에서 오는 시내 버스를 20여분 기다리다 버스를 타고 나는 문무대왕암능 를 지나 양남면 소재지 에서 버스를 내렸다
경주 양남면 소재지를 오기전 긴 터널을 지났는데 알고보니 이곳이 바닷 쪽으로 원자력 발전소가 있어 한참을 다리는 긴터널을 지나서야 겨우 양남면 사무소에 도착하니 오후 7시가 다되어 간다 정류장에 내려 울산 태화강역 700번 시내버스가 7시 30분에 있다고 정류장 계시판에 시간표가 써있다
나는 이곳에서 30여분을 기다리기가 지루하여 저녁을 사먹을까 하다 마땅한 음식점이 없어 그냥 안먹고 가기로하고 어두운 바닷가 쪽으로 가 캄캄한 바닷가를 관람하고 7시반에 될때까지 이곳 양남면 면소재지 주변을 한참을 걸어다녔다
난생처음 이곳에서 바닷가 생활상을 살펴보고 시골 정류장에서 기다림의 추억을 실천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글을 쓰다가 감은사지에 대하 여 궁금한점이 많아 인터넷 배과 사진에 찿아보니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감은사지
682년(신문왕 2) 신문왕이 부왕 문무왕의 뜻을 이어 창건하였으며, 사지의 부근인 동해바다에는 문무왕의 해중릉(海中陵)인 대왕암(大王巖)이 있다.
문무왕은 해변에 절을 세워 불력으로 왜구를 격퇴시키려 하였으나, 절을 완공하기 전에 위독하게 되었다. 문무왕은 승려 지의(智義)에게 “죽은 후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킬 것”을 유언하고 죽자 이에 따라 화장한 뒤 동해에 안장하였으며, 신문왕이 부왕의 뜻을 받들어 절을 완공하고 감은사라 하였다.
그 때 금당(金堂) 아래에 용혈을 파서 화룡(化龍)한 문무왕이 해류를 타고 출입할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였다. 682년신문왕은 동해의 호국룡이 된 문무왕과 삼십삼천(三十三天)의 아들로 태어난 김유신(金庾信)으로부터 나라를 지킬 보물인 신비스러운 피리 만파식적(萬波息笛)을 얻었다.
그 뒤 이 절은 황룡사(皇龍寺)·사천왕사(四天王寺) 등과 함께 호국의 사찰로서 명맥을 이어왔으나, 언제 폐사가 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절터에는 국보 제112호인 삼층석탑 2기가 있다.
제일 윗부분인 찰주(擦柱)의 높이까지를 합하면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석탑 중에서 가장 큰 것이다. 이 탑은 고선사(高仙寺)의 삼층석탑, 나원리의 오층석탑 등과 함께 신라통일기의 전형적인 탑파양식을 따르고 있다.
1966년 동서로 나란히 있는 쌍탑 중 서 삼층석탑에서 임금이 타는 수레의 형태인 보련형(寶輦形) 사리함이 발견되었는데, 보물 제366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1996년 동 삼층석탑이 해체 수리되면서 서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것과 형태가 유사한 사리함이 발견되었고, 사리 10여과가 나왔다.
동탑의 사리함은 지붕인 천개(天蓋)의 양식이 서역의 영향을 받았음을 6세기에 조영된 중국 당대(唐代)의 돈황(敦煌) 막고굴(莫高窟) 벽화 및 구조 등과 비교하여 알 수 있었으며, 1966년 서탑에서 발견된 사리가 진신사리(眞身舍利)임에 비해 동탑에서 나온 사리는 문무왕의 사리가 아닌가 추정하기도 한다.
경주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
국보(1962.12.20 지정). 높이 13.4m. 동서로 건립된 두 탑의 규모와 형식은 동일하며, 현존하는 석탑 중 거탑에 속한다. 기단은 상하 이중으로 되어 있고 지대석·중석·갑석은 12장의 석재로 이루어져 있으며, 하층기단에는 3개, 상층기단에는 2개의 탱주를 세웠다
탑신부의 1층은 우주와 면석을 다른 돌로, 2층은 각 면을 하나의 돌로, 3층은 전체를 하나의 돌로 만들었다. 옥개석은 비교적 넓고, 낙수면 부분과 받침부분이 각각 4장의 돌로 되어 있으며, 상륜은 없어졌고 그것을 끼웠던 3.5m의 철간만이 남아 있다. 상하기단과 탑신부에 우주와 탱주를 표현한 것, 낙수면이 경사를 이룬 것 등에서 목조건축양식이 보이며, 층단을 이루고 있는 받침에서는 전조탑파양식의 흔적이 보인다. 고선사지3층석탑과 함께 통일신라 초기 3층석탑을 대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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