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교동도에서 연산군을 만나다

한마음주인공 2018. 10. 2. 13:10

아침기온이 10도를 가리키며 차가워진 아침공기를 실감하게 된다 연일 가을날씨를

피부로 느끼며 하루를 여는것 같다 그렇게 가을은 이미 우리곁에 와 있는것이다

 

 

 

 

 

 

 

 

 

모처럼 추석휴무을 맞이하여 교동도를 찿게 되었다 교동도에서 가장 높은산 화개산

을 중심으로 화개산 화계사와 그리고 연산군 유배지 화개산 정상에서 만난 구석기인

들의암각화문자등이 돌에 새겨져 있다 

 

 

 

*연산군이 유배지에서의 생활상을 조각상으로...

 

 

 

 

 

 

 

 

 

그리고 화개산 정상에는 에전 사람들의 통신수단인 봉화대가 있다 요번에 여행하면서 알개된 화개산에는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내성과 외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처럼

화개산과 연관된 문화재가 교동도 화개산에는 많이 있다

 

 

 

 

 

 

 

오늘 처음 알개된 화개산 연산군 유배지(위리안지)에 대하여 알아보려고 한다 먼저

연산군 유배지를 가려면 5년전 준공된 교동대교를 건너 교동면사무소로 올라가 걸어서 20분 정도만 닿을수 있는곳이 바로 연산군 유배지이다

 

 

 

 

*연산군의 유배행로

 

 

우선 연산군 유배지에 도착하여 유배문화관에서 과거 교동에 유배되어 생활하였던

당시유배지로 가는 행열과 유배지생활상을 조그만 초가집에 방한칸이 딸린 부엌에서

유배자의 식사모습을 재현 해 놓은것을 볼수있다

 

 

 

 

 

연산군에 대하여 궁금하여 인터넷 백과사전에 찿아보니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연산군

조선시대 대표 폭군으로 일컬어지는 조선 제10대 왕이자 성종의 맏아들로 이름은 융. 재위 중 신진 세력인 사림파를 제거하려는 훈구파의 모의와 어머니 폐비 윤씨의 죽음에 대한 상처로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일으켜 관련된 많은 인물을 처형해 조선시대 대표 폭군으로 일컫는다.

 

 

 

 

 

즉위 초 빈민구제정책, 서적 간행, 국방 강화책 등을 시행했으나, 또한 사치와 향락에 빠져 왕권을 견제하는 기관들을 폐지하고, 인목대비 상례를 대충 치르는 등 유교사상에 반하는 행위가 잇따르자 성희안 등이 왕을 몰아내고 성종의 차남 진성대군을 왕으로 옹립했다.

 

 

 

 

 

유배라는 단어를 인터넷 배과사전에서 찿아보니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유배(流配)

중한 죄를 범했을 때 차마 사형에는 처하지 못하고 먼 곳으로 보내어 죽을 때까지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형벌이다. 귀양·정배(定配)·부처(付處)·안치(安置)·정속(定屬)·충군(充軍)·천사(遷徙)·사변(徙邊)·병예(屛裔: 변방으로 내쫓음)·투비(投畀: 왕명으로 지정한 곳에 죄인을 귀양 보냄) 등으로 표현하였다. 또 간단히 배(配)·적(謫)·방(放)·찬(竄)·사(徙) 등으로도 불렀다.

 

 

 

 

 


의금부나 형조에서 유배형을 받으면, 도사 또는 나장들이 지정된 유배지까지 압송하였다. 그곳에서 고을 수령에게 인계하고, 수령은 죄인을 보수 주인(保授主人)에게 위탁하였다.

 

 

*연산군 유배지옆에 있는 유배문화관

 

 

 

 

보수 주인은 그 지방의 유력자로서 집 한 채를 거주할 곳으로 제공하고 유죄인을 감호하는 책임을 졌다. 그곳을 '배소' 또는 '적소(謫所)'라고 하였다.배소에 있는 유죄인의 생활비는 그 고을이 부담한다는 특명이 없는 한 스스로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유배역사

 

 

 

 
따라서 가족의 일부 또는 모두가 따라가게 마련이었다. 1449년(세종 31) 휘지(徽旨)에 따라 유배인의 처첩 및 미혼 자녀는 함께 살게 하고 조부모·부모 및 기혼 자녀도

오갈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유형은 원래 기한이 없이 종신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러나 죄가 감등되거나 단순한 자리 이동으로 유배지가 옮겨지기도 하고 사면으로 형이 풀리기도 하였다. 사령(赦令)이 일 년에도 몇 번씩 너무 자주 내린 탓인지, 1762년(영조 38) 고을 수령을 허위로 고소한 이천 사람 이득룡(李得龍)에게 물한년정배(勿限年定配)를 명한 것처럼 물한년의 조건을 붙인 형을 내린 예가 가끔 보인다

 

 

 

 

 

 

이처럼 유배란 먼곳으로 보내어 죽을때까지 기존의 권자에서 완전히 벗어나 외로운

생활로이어지는 어찌보면 죽일것과 같은 형벌로 보인다 그러한 형벌의 장소가 교동도이었고 많은 왕과 왕족들이 강화 교동도에 들어와 형벌을 받았다고 한다

 

 

 

 

 

 

연산군 유배장소도 화개산 초입에 위치하고 있고 큰 미류나무 한그루가 서있었고

뒷편으로는 화개산을 오르는 등산로가 잘 정비되 있었다 우선 유배문화관에 들러

간단하고 조화있게 잘 설명된 전시물을 살펴보고 이곳의 지리적 위치를 알게된다

 

 

 

 

 

 

 

 

고려시대 와 조선시대 왕들의 유배사실과 유배지에서 고초를 겪어가며 죽어간 어찌

보면 슬픈사여이 서려있는 역사적 장소인 유배지에서의 생활상을 조금이나며 알게

된다

 

 

 

 

 

 

평상시 자기일 반성과 충성심 그리고 모함에의하여 버려져 유배지로 끌려와 한만은

삶을 눈물로 보내고 통탄하며 하루하루를 보냈을 유배자 연산군을 생각해보며 당시

내가 연산군이 었다면 나는 과연 어떻게 대처하였을지를 생각해 본다

 

 

 

 

현재 유행어로 있을때 잘하라는 뼈있는 한마디가 아마 유배자의 마음에는 통한의 순간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시골 외진 교동도 화개산 유배지 마을은 어둡고 추운날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화개산 오르는길에 숲사이로 북녘산하가.............

 

 

                *화개산에서 내려와 식당에서 멋진 글을 보게되다

 

 

나는 이번 화개산를 들러보며 이곳이 예전에는 바다갯벌과 사람이 거주 할수 있는 천해의 조건이 갖추고 있던 그런 섬이 교동도가 아닌가 한다 먹을것이 풍부하고 이섬의

구석기인들이 머물며 생활하기엔 주변 여건이 너무나 풍요로운 섬이 교동도가 아니였나 생각돤다

 

 

 

 

 

 

지금은 다리가 놓아져 육지나 다름없지만 예전에 배타고 화개산를 가려면 여간 불편한 산이 화개산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지금은 강화읍에서 20분이면 화개산 입구에 닿게되니 여간 편리한게 아니다 다시한 유배지에서 연산군을 만나보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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