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명성황후를 만나다

한마음주인공 2018. 1. 3. 15:17

 

지난해 년말인 12월 23일 경기 여주에 위치하고 있는 명성황후생가에서 명성황후를 문화해설사를

통하여 명성황후의 생애를 다소나마 알게되고 해설사가 전하는 진실을 알게 되었다

 

 

 

 

 

 

명성왕후생가를 만나기위해 영동 제2고속도로에서 여주톨케이트로 나와 인터넷 티맵으로 명성황후를 치고클릭하니 이내 정확한 안내가 시작되어 어렵지 않게 생가터를 찿게 되었다

 

 

 

*명성황후 기념관으로 가는중 연못에서.......

 

*연못 잉어들

 

 

 

명성황후생가 입장료는 주차비 포함 2000원을 내고 들어오게 되었다 마침 군 장병 20여명이 명성황후

기념관에서 문화해설사의 역사이야기를 듣고있어 나도 이들과 함께 명성황후 해설 안내를 받게되었다

 

 

 

*명성황후 기념관

 

*도자기로 그려진 명성황후

 

 

기념관 규모는 크지 않으나 명성황후의 탄생과 즉위식풍경 그리고 명성황후의 역사를 알수있는 많은

안내판과 전시물이 간결하고 정교하게 전시되고 있었다

 

 

 

 

*기념관 내부 전시물

 

 

 

                *명성황후 영정

 

 

기념관에서 문화해설을 하시는 황선자님 이셨는데 어떻게 명성황후의 일대기를 잘 설명 해주시

는지 오래도록 그 역사이야기를 간직하게 될 것 같다 그리고 해설사님이 명성왕후에 살해에 대한

책 "미야모토소위 명성황후를 찌르다" 이종각 교수 지음 을 소개 해 주셨는데 이책을 구입하여 읽고

싶다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역사 연표

 

 

우리나라 어떤 관광지를 가든 그 지방자체 단체에서 판견하여 역사안내를 해주시는 문화 해설사가 있는데그냥 들어가서 돌아 보는것보다 해설사의 이야기를 듣고나면 색다를 역사를 새삼 알게 해준다

 

 

 

 

*군인장병들과 명성황후 해설사 경청중에..............

 

 

 

 

*여흥민씨 족보

 

 

우리가 흔히 명성황후는 일본인 낭인및 자객에 의하여 시해되었다고 전해진다 요번에 생가에 방문하며시해라는 문구가 매우 부적절한 표현임을 알게 되었다

 

 

 

 

시해(弑害)란 부모나 임금 등 윗사람을 죽이는 것을 일컷는데 이 시해라는 표현이 적절하지않은 아주

점잔한 사건을 표현하는것이 아닌 살해(殺害)란 생명체에 상해를 입혀서 죽이다. 인간이 불특정 인간에게 이런 행위를 저질렀다면 살인. 특정한 대상에게 이런 행위를 저질렀다면 살해다라는 말이 마땅하다고 한다

 

 

 

 

다시말해 시해라는말은 일본인이 역사의미를 가미하여 지어낸 점잔한 표현이 아니라 고도로 훈련된

일본무사(전문 살인교육자)에 의해 철저하게 계획하고 저지른 살해사건이라고 단정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이사건을 철저하게 파헤친것이 바로  에조보고서다

 

 

 

에조보고서는 명성황후를 살해전 능욕(여자를 강간하고 욕를 보임)하고 시간(죽은사체에 강간하는것)하여살해되었다고 보고하고있다 이 자료는 한일월드컵과 107년전 을미사변  오마이뉴스 "명성황후 시해전 능욕당했다 (단독발굴) 에조보고서 일본서입수 국내첫공개 되엇다

 

 

 

*명성황후 생가터

 

 

에조 보고서'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70여년이 흐르는 동안 철저하게 숨겨져 있었다. 이 보고서를 맨 처음 찾아낸 사람은 일본의 역사학자 야마베 겐타로(1905∼1977). 그는 1966년 2월 <일한병합소사>를 이와나미에서 발간했다. 그는 이 저서에서 "사체 능욕"이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썼는데, 이것이 바로 그후 국내 역사학계에서 거론되기 시작한 '명성황후 능욕설'의 원조가 됐다. 

 

 

*생가 사랑채

 

*생가 안채

 

 

 

이상과 같이 명성홯후는 비참하게 살해되고 시신을 불태워졌다고 하니 당시 살해현장에서 이사건을 목격한사람은 이글을 쓰기가 너무 비참하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고 한다

 

 

 

 

명성황후의 본명은 명성황후의 본명은 민정호(閔貞鎬)라고 한다 오늘 내가 찿은 명성황후 생가터에서

명성황후의 어린시절 생활하던 생가터를 관람하며 강대국 사이에 끼어 어떻게든 조국을 위해 큰일을

하고자하던 명성황후의 꿈이 한순간 비참하게 사라지고 일본 살해기술자에 의하여 살해된 처참한

현실에 당시의 명성황후의 마음을 잠시나마 헤아려보며 약속국의 서러움을 개탄해 본다

 

 

 

 

 

 

 

명성황후에 대하여 궁금한점이 있어 명성황후를 인너넷 다음백배과 사전에서 찿아보니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있다

명성황후(明成皇后)

흥선대원군에 맞서 개화정책을 펼친 조선의 제26대 왕 고종의 왕비. 쇄국정책을 펼쳤던 흥선대원군의 실각 후 정권을 장악하여 개화정책을 펼쳤으며, 여성부원군 치록의 외동딸로 16세에 왕비가 된 후 대원군과의 불화가 지속되자 반대원군 세력을 규합하여 탄핵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으로 이어진 일련의 사건들 가운데 있었다. 3국간섭으로 일본의 대륙침략 기세가 꺾이자 친러성향으로 굳혔다. 명성황후와 그 세력을 일본의 조선 병합에 가장 큰 장애로 여겼던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가 일으킨 1895년 을미사변 중에 시해당했다. 사후 명성황후로 격상되었으며 양주 숙릉에 묻혔다가 1919년 고종 사후 홍릉으로 이장되었다.

 

 

 

                 *명성황후 탄강 구리비

 

 

본관은 여흥.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치록(致祿)의 외동딸이다. 8세 때 부모를 여의었기 때문에 친척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1866년(고종 3) 3월, 16세 때 부대부인 민씨(府大夫人閔氏)의 추천으로 왕비가 되었다. 고종의 사랑을 그다지 받지 못했고, 1871년 자신이 낳은 첫번째 왕자를 5일 만에 잃는 등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었다.

 

 

 

 

 

 

원군과의 불화는, 대원군이 고종의 총애를 받던 궁인 이씨 소생의 완화군(完和君)을 세자로 책봉하려 한 데서 시작되었는데, 명성황후의 배후에는 민승호 등 여흥민씨 삼방파(三房派) 세력을 비롯해 조대비(趙大妃)를 중심으로 한 풍양조씨(豊壤趙氏) 세력, 대원군에게 무시된 대원군 문중 내부의 세력, 그리고 대원군 정책에 반대하는 유림세력 등 노론을 중심으로 하는 반(反)대원군 세력이 있었다.

 

 

 

 

이들은 대원군이 당쟁을 근절한다는 명분 아래 등용한 남인 중심의 세력과 정치적 갈등을 빚고 있었다. 1873년(고종 10) 반대원군 세력을 규합한 명성황후는 앞서 대원군을 탄핵한 바 있는 을 동부승지로 삼고, 그해 10월 26일 그로 하여금 대원군의 실정(失政)을 들어 탄핵하고 고종의 친정(親政)을 요구하는 소(疏)를 올리게 했다.

 

 

 

이때 조정의 의견이 서로 달랐지만 그녀는 최익현을 감싸고, 그를 호조참판으로 승진시켰다. 최익현은 11월에 다시 상소를 올리고, 대원군은 양주 곧은골[直谷]로 물러나게 되었다 

 

 

 

 

 

 

하루빨리 명성황후시해사건의 시해라는 말이 비참한 살해로 명기되기를 바라고 이처럼 억울하게 돌아

가신 명성황후를 위해 정확한 역사기록을 고처져서 후대에 자라나는 후손에게 올바른 역사교육이 되기를 간절해 발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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