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우연한 기회에 서울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봉은사를 방문하게 되었다 강남도심 속 고찰 봉은사는 지역의
위치 사찰규모가 다른 사찰과 구분되는 서울 강남 중심에 있는 조계종 계열 사찰로서 오늘은 봉은사에 대하여
알고 싶어 졌다 그래서 지하철 9호선 봉은사 역에서 내려 봉은사를 찾게 되었다
우선 봉은사 입구에는 일주문이 있는데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수 있도록 담장이 없는 게 아무도 우리 불교에서
말하는 불심으로 이어지는 자유통행의 의미가 가득한것 같아 너무 좋았다 왠지 입구에 담장이 있으면 입장료를
내야 하고 절차가 있어 번거로움이 없는 게 얼마나 편리했는지 누구나 다 차별 없는 법으로 인도하는 불자비심이
아닌가 한다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을 지나 다시 작은 경사가 있는 길을 오르니 좌우에 소나무와 작은 연못이 이사찰의 역사를
자연스럽게 이야기 해주는 것 같다 그리고 어니 누각이 있는 곳을 지나며 주위에 여러 무더기로 쌓어있는 쌀과 찹쌀
보시 물건들이 수두록하다 역시 대형 도시 사찰에서 보는 풍경이다 한편 이런 대형 사찰이 이런 도심 중앙에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고 고마웠다
이어 조금 오르니 대웅보전이다 이곳에 모셔진 부처님은 대웅보전의 규모에 맞지 않게 작은 부처님이 셨다 일전에
조계사에서 보았던 부처님과는 규모에 비해 작아 보였다 그러나 부처님 외형 모습으로 불심을 판단하기에는
너무 소박하고 단아한 부처님이 한층 더 보기가 좋았다
이곳 봉은사는 알고 보니 템플스테이를 하고 있어서 인지 역시 많은 외국인들이 보인다 특히 큰 석불대전에는 아시아계
불자외국인들이 많이도 와서 부처님 주위를 합장하고 도는 모습이 국경을 넘어 부처님의 자비 사랑은 영원한 것 같다
이어 조금 대웅보전우측으로 오르니 작은 계단과 삼성각 비슷한 곳에 비닐을 치고 기도하는 이들이 있고 비록 건축물은
낡았지만 찾아오는 이들이 참 많아 보였다
이어 큰 대불이 있는 곳으로 와보니 석조물로 된 큰 부처님이 손에 목탁 같은 것을 잡으시고 큰마음으로 우리를 반겨 주신다 바로 앞에는 기도하는 단이 있어 이곳에서 기도하는 이들이 여러 이 모여 있다 이곳 대불을 3바퀴 함장하고 돌고 나와
계단같은 휴식처와 같은 긴 의자에 안아 다시금 부처님의 위대함을 마음에 새겨보게 된다
이어서 다시 입구로 나와 우측으로 와 봉은사 명상 산책길을 올라본다 돌로 계단을 만들고 봉은사의 외곽을 이어지는
길이었는데 알고 보니 이곳에는 철조망이 있던 것을 제거하고 게단과 인도를 만들어 봉은사명상 산책길로 시민에게
개방되어 도심 속 자연과 사찰을 어우리는 그런 공간으로 조성되어 너무 아름다은 길이였다
봉은 사 북쪽 뒤에는 경기고등학교가 자라 잡고 있고 그 앞에 봉은사 전경이 아래로 잘 배치되어 도심 속 한옥건물
사찰이 더 대조적으로 잘 나타나 도심속 사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게 한다 이어서 조금 내려오니 좌측면에서 본
봉은사 전경이 올라올 때 정면으로 본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 같다 아까 대웅보전옆 우측 소나무 한그루가 한옥과
너무 잘 어울리는 풍경이었는데 역시 소나무는 한옥건물에 너무 잘 어울리는 나무인 듯하다
오늘 우연하게 봉은사를 찾아와 돌아보며 도심 속 봉은사와 봉은사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좀 더 알고파 인터넷
백과사전에 찾아보니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봉은사
봉은사는 서울특별시 강남구 수도산(修道山)에 있는 사찰이다. 창건 당시에는 견성암이라 하였는데 1499년(연산군 5) 선릉의 능침사(陵寢寺)가 되면서 봉은사라 사액되었다. 1551년(명종 6) 이 절을 선종의 수사찰(首寺刹)로, 광릉의 봉선사는 교종의 수사찰로 삼았으며, 보우를 주지로 삼아 불교를 중흥하는 중심도량이 되게 하였다.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직영 사찰이다.
2010년 이래 대한불교조계종 직영 사찰이다. ‘봉은사’라는 절은 시대별로 신라의 수도 경주나 고려의 수도 개경에 동명이사(同名異寺)가 있어 종종 혼동되기도 하는데, 서울의 봉은사는 조선시대에 건립된 절이다.
15세기 중반 광평대군(1425~1444)이 죽자 그 부인 신 씨가 남편의 명복을 빌기 위해 광평대군 묘 부근에 견성암(見性庵)이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는데 절의 규모가 점차 커짐에 따라 견성사(見性寺)로 개칭되었다.
성종(재위 1469~1494)이 죽자 그 능인 선릉(宣陵)이 건설되면서 견성사가 능역에 포함되었다. 이에 절을 없애자는 신료들의 의견과 유지하자는 왕실의 입장이 대립하였는데, 1498년(연산군 4) 견성사를 선릉 밖으로 이건(移建)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견성사는 이건 되면서 크게 중창되었으며 선릉의 정식 능침사(陵寢寺)로 지정되어 봉은사로 사액(賜額)되었다. 이때 건립된 봉은사의 자리는 선릉의 동쪽 기슭으로 현재 중종의 정릉(靖陵)이 있는 자리이다.
1551년(명종 6) 이 절을 선종(禪宗)의 수사찰(首寺刹)로, 광릉의 봉선사(奉先寺)는 교종(敎宗)의 수사찰로 삼았으며, 허응 보우(虛應普雨)를 주지로 삼아 불교를 중흥하는 중심 도량이 되게 하였다.
1562년(명종 17) 중종의 정릉을 선릉 동쪽으로 천장(遷葬)하면서 그 자리에 있던 봉은사를 다시 수도산으로 옮겨 지었는데, 이때 문정왕후의 지원으로 대대적인 중창이 이루어졌다. 이후 봉은사는 선정과 정릉의 능침사로 기능하였다. 이것이 현재의 수도산 봉은사이다.
1563년(명종 18) 절에 순회세자(順懷世子)의 사패(祠牌)를 봉안하기 위하여 강선 전(降仙殿)을 세웠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사찰은 병화로 소실되었고, 1637년(인조 15)에 경림(敬林)과 각성(覺性)이 모연(募緣)하여 중건하였다. 1665년(현종 6)에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1692년(숙종 18)에 왕실에서 시주하여 석가모니불 ·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 · 약사여래 등의 삼존(三尊) 불상을 안치하였고, 1702년(숙종 28) 왕이 절에 전백(錢帛)을 하사하여 중건을 완료하였다.
1747년(영조 23)에는 순찰사 남태저(南泰著)의 주청(奏請)으로 조정에서 쌀과 돈, 목재 등을 내리고, 1757년(영조 33)에 상헌(尙軒) · 영옥(穎玉) · 선욱(善旭) 등이 힘을 모아 중수하였다.
1789년(정조 13) 조정의 지시에 따라 선욱 · 포념(抱念) 등이 세자각(世子閣) · 대웅전 · 명부전 · 향각 전 · 관응당(管應堂) 및 각 방사(房舍)를 보수하였고, 1790년에 전국 사찰의 승풍(僧風)과 규율을 감독하는 오규정소(五糾正所)의 하나가 되어 강원도와 경기도의 사찰 일부를 관할하였다. 1824년(순조 24)에는 경성(鏡星) · 한영(漢映) · 승준(勝俊) 등이 세자각을 비롯하여 모든 당우(堂宇)들을 중수하였다.
일제강점기의 31 본산 시대에는 경성 일원을 관장하는 본산(本山)이 되었다. 당시의 가람(伽藍)으로는 대웅보전(大雄寶殿) · 대향각(大香閣) · 화엄경판전(華嚴經板殿) · 선원(禪院) · 영산전(靈山殿) · 심검당(尋劒堂) · 관응당 · 천왕 전(天王殿) · 강선 전(降仙殿) · 독성각(獨聖閣) 등이 있었다.
1939년 실화로 대웅전, 동서의 승당과 진여문, 만세루, 창고 등이 소실되었으며, 1941년 주지 도평(道平)이 대웅전과 동서의 두 승당(僧堂)을, 1942년 영산전 · 북극전(北極殿) · 만세루(萬歲樓) · 천왕문(天王門) 등을 새로 세웠다.
1943년 절의 서쪽에 있던 중난산(終南山) 명성암(明性庵)을 이곳으로 이건 하였고, 1972년 동국역경원의 역장(譯場)이 이곳에 들어왔다. 1975년 진신 사리 1 과를 봉안한 삼층석탑과 석등을 조성하였으며, 1982년에 진여문과 대웅전을 중창하였다. 1996년에 미륵대불을 조성하였으며, 1997년 천왕문과 법왕루(法王樓)가 철거되고 새로운 건물이 들어섰다.
절에 소장되어 있는 국가 지정 문화재로는 1963년 보물로 지정된 청동 은입사(銀入絲) 향완(香碗)과, 2014년 보물로 지정된 목조 석가여래 삼불좌상(木造釋迦如來三佛坐像),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선불당(選佛堂), 판전(板殿)과 판전(板殿) 현판(懸板), 목 사천왕상(木四天王像), 목 삼존불상(木三尊佛像), 목 십육나한상(木十六羅漢像), 대웅전 신중도(大雄殿 神衆圖), 판전 신중도(板殿 神衆圖), 괘불도(掛佛圖), 비로자나불도(毘盧舍那佛圖), 칠성도(七星圖), 삼세불도(三世佛圖), 삼장보살도(三藏菩薩圖), 감로도(甘露圖),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 십육나한도(十六羅漢圖), 시왕도(十王圖), 사자도(使者圖), 영산전 신중도(靈山殿神衆圖) 등이 있다.
청동 은입사 향완에는 고려 충혜왕 5년 (1344)의 명문(銘文)이 있는 고려 청동 누은 향로(高麗靑銅縷銀香爐)로, 일명 오동 향로(烏銅香爐)라고도 한다. 사명당 유정이 쓰던 것으로,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대웅전(大雄殿)’ 편액은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글씨이며, ‘판전(板殿)’ 편액은 김정희가 죽기 3일 전에 쓴 것이다. 절의 판전에는 『화엄경소』를 비롯한 많은 목판본이 보관되어 있는데 현재 총 16부 1,480매에 달한다.
소장된 경판은 다음과 같다.
『대방광불화엄경소초(大方廣佛華嚴經疏抄)』: 1856년(철종 7)에 개간(開刊) 한 것인데 한문으로 되어 있으며, 총 3,133매로 결판(缺板)이 45매 89판이다.
『유마힐소설경직소(維摩詰所說經直疏)』: 125매로 한문으로 되어 있으며, 결판이 3매 있다. 간기에는 함풍(咸豐) 4년(1854) 강원도 철원군 보개산 성주장판(聖住藏板)으로 되어 있다.
『천로금강경(川老金剛經)』: 1869년(고종 6) 개판되었으며 한문으로 된 『금강반야바라밀경』으로, 모두 21판이나 1매의 결판이 있다.
『불설천지팔양신주경(佛說天地八陽神呪經)』: 한문으로 되어 있으나 한글로도 음석(音釋)되어 있다. 36매 72판의 완본(完本)으로서 의정(義淨)이 번역한 것을 경화(敬和)가 주석하였다. 서(序)와 발문 역시 경화가 적었으며, 간기에는 도광(道光) 19년(1839) 철원 보개산 석대암장판(石臺庵藏板)이라고 되어 있다.
『불설아미타경(佛說阿彌陀經)』: 1915년 개간본으로 한글로 되어 있으며, 8매 32판의 완본으로 추정된다.
『심경(心經)』: 한문으로 되어 있으며 4판이다.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 9판으로 한문으로 되어 있으며, 결판으로는 「발심(發心)」 1매가 있다.
『한산시(寒山詩)』: 51매로 한문으로 되어 있으며, 결판은 2 매이다.
『불설천수천안관세음보살광대 원만 무애대비심다라니경(佛說千手千眼觀世音菩薩廣大圓滿無碍大悲心陀羅尼經)』: 한문 16매의 완본으로 간기에 함풍 7년(1857) 광주 수도산 봉은사 장판으로 되어 있다.
『준제경(准提經)』: 한문으로 된 12매의 완본이다.
『육조법보단경(六祖法寶壇經)』: 한문으로 되어 있으며 19매로 결판이 다수 있다.
『고왕경(高王經)』: 1매로 한문으로 되어 있으며 결판은 다수이다.
『약사유리광 여래본원공덕경(藥師瑠璃光如來本願功德經)』: 1528년(중종 23)에 개판하였다.
『대방광불화엄경보현행원품소(大方廣佛華嚴經普賢行願品疏)』: 1856년(철종 7)에 개판하였다.
『불설칠구지불모준제다라니병염송관행법(佛說七俱胝佛母准提陀羅尼竝念誦觀行法)』: 1587년(철종 8)에 개판하였다.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 1861년(철종 12)에 개판하였다.
봉은사 부속 시설로 역경원(譯經院)이 설치되어 있으며 판전 서쪽의 명성암(明性庵)과 승방 등에서 대장경의 한글 번역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봉은사 일대 1만 8000여 평이 사찰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민간인 유료 공원으로 개설 허가가 나자 최초로 봉은사가 신청한 것인데, 이 계획에 의하면 1만 8000여 평의 부지에 기존의 종교 시설과 주민 휴식 시설, 산책로 등을 조성하고 공원 내에 식수 사업을 하여 도시 속의 녹지대로 만드는 것 등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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