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1호선을 타고 가다 동묘역에서 내려 밖으로 나오니 길건너에 문화재로 되어 동관묘가 나온다 동묘또는 동관묘 라는
것은 우리나라 전국에 많이 분 돼 되어있는데 중국의 관우장군을 모시는 사당이다 오래전부터 이 주변을 오가다가
동관묘안으로 들어가 관람하게 되었다
건물양식이 우리나라에 있지만 중국식 건물에다 주변 조경이나 모든것이 중국식이다 그리고 이곳 안에 들어오니 이 건물이 명나라의 교역이 잣고 교류가 있어 명나라에서 중국양식으로 지어졌다고 하는데 서울 안에 이런 큰 건물이 실제로 와보니 엄청 큰 사당이다 그리고 주변도 잘 정리되어 있다 마치 내가 중국을 여행 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동묘를 들어가고 나오는 길옆에는 고미술품이나 골동품 그리고 중고 옷 가전 음식 과일 등 여러 가지 물건을 팔고 사는 이로 북적인다 간신이 인파를 지나 동묘안을 구경하고 나와 보문사를 가기 위해 북한산 도선사 행 무인전철을 탈까 하다 이내 걷기로 하고 조금 오르니 왼쪽으로 창신초등하교가 나오고 조금오르니 청룡사라는 사찰이 나온다
다시 조금 언덕을 오르니 이곳 단종의 왕후가 단종을 강원도 보내고 홀로 사시다가 가셨다는 문화재가 나오고 다시 조그만 언덕을 오르니 정상이다 이곳 동망봉으로 가려다 눈이 내려 미끄러워 다시 돌아 보문사 방향으로 걸어내려가니 동신초등학교가 좌측으로 나온다 이곳의 언덕길이 좀 가팔라 눈이 내리면 조금 위험하겠다는 예상을 하고 조금 내려가니 내가 찾던 보문사다 보문사는 내가 성북구에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직접 찾아오기는 난생처음이다
보문사경내로 들어가 참배한 후 주위요사체를 지나 경내를 조금 오르니 큰 탑과 석굴암부처님같이 부처님이 모셔져 있었다 잠시 마음의 참배를 하고 이곳저곳을 둘러보는데 이곳 보문사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건축요사체가 빽빽하게 들어 있어 마치 미로사이를 지나는 기분이다 이곳 보문사도 참 역사가 깊은 사찰 중에 하나이다
보문사에서 나와 다시 내려와 보문역에서 정릉 가는 기차를 타고 정릉에서 내려 정릉 입구로 걸어 올라가니 이곳 가는 길에는 참 작은 사찰이 많이도 있다 한참을 올라가니 정릉입구 매표소이다 표를 구해 입장하고 들어 갔는데 눈이 내려 묘지 부분이 하얀 눈으로 쌓여 묘한 기분을 자아낸다 그리고 가는 길에 작은 개울길이 있었는데 어찌나 말고 깨끗한 물이 흐르던지 이런 곳에 개울 환경이 잘 관리된다는 게 아주 큰 위안이 된다
정릉의 제사준비하는 건물과 정릉을 관리하는 이들이 사용하는 건물을 돌아보고 이 내나 와 다시 종릉역에서 종로 5가 가는 기차로 갈아타고 종로 5가에서 내려와 7번 출구로 나오니 광장시장이다 이곳엔 많은 관광인파들이 먹을 것을 두고 참 많이들 모여 기다고 먹고 줄 서기를 하고 있다 외국인이 유독 광장시장에는 많이 와 줄기고 있는 듯하다 날은 추워도 어찌 알고 이렇게 오는지 참 신기하기만 하다
예전에 고모님이 광장시장에서 포목재료를 사다가 한복을 졌는데 그때 그곳이 여기구나 하는 기분으로 이곳저곳 드라다 태열 아저씨를 만나 이곳 골목 안길에서 저녁용으로 팥죽과 떡볶이를 시켜 먹었는데 참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날은 추웠는데 맛이 괜찮다 그래서 이곳을 많은 이들이 찾는다고 하니 이해가 된다
이 글을 쓰면서 오늘 내가 갔던 동묘와 청룡사 보문사 정릉, 광장시장을 인터넷 배가 사전에 찾아보니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동묘
흥인지문 밖 숭인동에는 동묘가 있다. 동묘는 중국 후한의 장수인 관우를 신앙하기 위해 건립한 묘당이다. 《증보문헌 비고》 <예고(禮考)>를 보면, 임진왜란 때 가끔 관우의 혼이 나타나 명나라 군사를 도왔으므로 군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관왕묘를 건립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란 후 민심 이반을 우려한 당시 기득권층이 중화사상에 입각한 사대주의적 통치 질서를 공고히 하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동묘 부근에는 고려의 태조 왕건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청룡사(靑龍寺)가 있다. 청룡사의 본래 이름은 정업원(淨業院)이었다. 이곳은 단종의 부인인 정순왕후 송 씨와 관련된 곳이다. 정순왕후는 단종이 영월로 유배를 가자 이곳 정업원으로 옮겨와 살았다. 정업원은 왕실 궁녀들이 말년을 보내던 곳이다. 정업원과 마주한 곳에는 동망봉(東望峰)이란 봉우리가 있는데 정순왕후는 매일 이곳에서 단종이 있는 영월 쪽을 바라보며 눈물지었다고 한다. 정업원에 행차한 영조는 이곳에 누각과 비석을 세우라 명한다
청룡사
청룡사(靑龍寺)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망산길(현재 숭인동)에 위치한 절로, 고려 태조 때 도선국사의 유언에 의해 창건되었다. 이 사찰은 한양의 외청룡 산등성이에 지어져서 ‘청룡사’라 불렸지만, 그 건립 연혁에 관해서는 정확히 전해지는 것이 없다.
제1세 주지로 혜원(慧圓)이 절을 맡은 이래로, 줄곧 비구니들만이 있었다고 한다. 그 예로 조선 건국 이후 이제현(李齊賢)의 딸이자 공민왕비인 혜비(惠妃)가 망국의 슬픔을 안고 스님이 되어 이 절에 있었다거나, 1차 왕자의 난 뒤에는 세자 이방석(李芳碩)의 누나인 경순공주(慶順公主)가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세조 때에는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를 떠난 후, 정순왕후(定順王后) 송 씨(宋氏)가 이곳에 머무르며, 날마다 동망봉(東望峰)에 올라 영월 쪽을 바라보았다고도 한다. 영조대의 이 기록들은 모두 정업원(淨業院)과 관련한 내용으로 청룡사의 전신을 정업원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에 관한 의문을 남긴다.
청룡사의 존치 시기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현존하는 유물을 통해서이다. 청룡사에는 17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진 석지장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보물, 2014년 지정)이 있는데, 이를 통해 청룡사의 정확한 존치 시기를 조선 중기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이 보물 외에도 1868년(고종 5)에 제작되어 명부전에 봉안된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칠성도(七星圖), 현왕도(現王圖)가 있으며, 1898년(광무 2)에 제작된 감로도(甘露圖), 1902년에 제작된 신중도(神衆圖), 가사도(袈裟圖), 석조삼불상(石造三佛像)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보문사
대한불교보문종의 총본산이다. 1115년(예종 10)에 담진(曇眞)이 비구니의 수련장으로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에는 조그만 암자로, 탑골에 있었으므로 탑골 승방이라 하였다. 그 뒤 1692년(숙종 18)에 대웅전을 개축하는 등 수차례 중수를 하였으며, 1945년부터 비구니 은영(恩榮)이 주지로 취임하면서 절을 크게 중창하였다.
원래는 조계종 산하의 소속 사찰이었으나 1972년 독립하여 보문종을 창종하고 보문종의 본산이 되었는데, 현재 그 규모면에서 굴지의 거찰(巨刹)이 되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극락전·석굴암·호지문·선불장(選佛場)·보광전(普光殿)·산령각(山靈閣)·석굴암노전(石窟庵爐殿)·삼성각(三聖閣)·별당·요사채, 한의원 및 특별양로원이 있는 시자원(施慈園)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석굴암은 은영이 그 분야의 권위자를 모아 준공위원회를 구성하여 조각과 설계를 하였고, 공사비만 1억을 들여 1972년 부처님 오신 날에 착공하였으며 3년 6개월의 역사 끝에 점안식을 가졌다. 경주 석굴암과 똑같은 규모로 만들었으나, 구성면에서 볼 때 경주 석굴암은 정면이 1문인 데 비하여 이곳은 3문이며, 실내 벽을 이중으로 만들고 실내 천장으로 공기가 유통되게 하였다. 단지, 경주 석굴암의 전실에 있는 팔부신중상(八部神衆像)을 이곳에서는 생략하고 있다.
정릉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에 있는 정릉은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 씨(?~1396)의 능으로 29만 9,573제곱미터다. 태조 이성계는 고려 시대 풍습에 따라 향처(고향의 부인), 경처(개경의 부인)를 두었는데 강 씨는 경처로 황해도 곡산부 상산부원군 강윤성의 딸이다.
이성계는 원 동녕부를 원정해 공을 세우고 남해 일대 왜구를 수차례 토벌하면서 고려 중앙인 개성에 진출했다. 하지만 지방 토호라는 출신 때문에 한계를 느꼈고 개성의 권문세족 출신인 강 씨와 정략적으로 혼인한 것이었다.
태조와 신덕왕후가 처음 만나 사랑을 싹 틔우게 된 일화는 유명하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 어느 날, 말을 달리며 사냥하다가 목이 타 우물을 찾았다. 마침 우물가에 있던 처자에게 물을 청했는데, 그녀는 바가지에 물을 뜨더니 버들잎 한 움큼을 띄워 이성계에게 건네주었다.
이성계가 버들잎을 보고 화를 내자 처녀는 "갈증이 심해 급히 물을 마시다 체하지나 않을까 염려되어 그리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대답을 들은 이성계는 갸륵한 마음 씀씀이에 반해 그녀를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그녀는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마자 현비로 책봉되었고 이성계와의 사이에서 방번, 방석 두 왕자와 경순공주를 낳았다. 본래 태조의 원비는 신의왕후였으나 태조 즉위 전인 고려 공양왕 3년(1391)에 사망했기 때문에 조선 왕조의 최초 왕비는 신덕왕후다.
광장시장
구한말 국내 정세가 혼미를 거듭하던 중 일본, 중국 등 열강세력의 각축장으로 국운은 풍전등화 격이었다. 1905년 고종 42년 을사조약 체결 후 실질적으로 주권행사는 일본이 장악했고 따라서 경제침략 정책을 기도한 바 그 한 예로서 남대문시장 경영권 장악하였고 경제적인 돌파구로 새롭게 문을 연 것이 종로의 광장시장이다.
1905년 우리나라 최초의 상설 시장 이 탄생한 순간이다. 원래 광장시장은 광교(너른 다리)와 장교(긴 다리) 사이를 복개하여 만들려고 했기 때문에 그 다리 이름의 첫머리를 따서 ‘너르고 긴’이라는 뜻의 광장(廣長) 시장이라 이름 지었으나 배오개로 터를 옮기며 이전 이름의 한글 발음은 그대로 둔 채 ‘널리 모아 간직한다’는 뜻을 새로 담아 현재의 광장(廣藏) 시장이 되었다. 시장개설 시 주요 거래 상품으로는 주로 농수산물, 신탄 등인데 가평·뚝섬 이천, 철원 등지에서 우마차로 반입하는 소규모의 단조로운 원시적인 시장 기능일 뿐이었으나 100년이 훌쩍 넘은 현재의 주거래 품목으로는 주단, 포목(한복), 직물(양복, 양장지), 여성의류제품, 커텐지, 침구, 수예, 나전칠기, 주방용품, 수입품코너, 청과, 건어물, 제수용품, 생선, 정육, 야채 등으로 상당량 거래 규모를 자랑하는 종합적인 면모를 갖춘 시장이 되었다.
청계천
총길이 5.84km, 하루 물 소비량은 12만 t이다. 청계천은 서울을 도읍으로 정한 조선시대부터 정비가 시작되었다.
‘개천’이라는 이름이 ‘청계천’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 때였다. 방치되어 있던 청계천은 1925년부터 종로구 신교동에서 도렴동까지, 1937년에는 태평로에서 무교동 구간이 복개되었다. 이후 1955년 광통교 상류를 시작으로 1970년∼1977년 청계 8가에서부터 신답철교까지 또다시 복개되었다.
1960~70년대 근대화의 상징이었던 청계천은 자연환경과 역사문화를 복원한다는 취지로 복원사업이 시작되었다. 복원 구간은 태평로에서 신답철교까지이며, 공사는 2003년 7월부터 2005년 9월까지 약 3,900억 원을 투입하여 진행되었다. 청계천 복원으로 청계천은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이처럼 오늘 동묘와 청계천 청룡사 보문사 정릉 길에서 비록 눈이 내려 추웠지만 우리 역사가 품고 있는 그런길을 이런 저런 생각하며 천천히 걸으며 이곳의 역사와 문화를 잠시나마 알게되어 참 좋은 역사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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