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변산 산행을 갔다가 관음봉에서 세 봉으로 하여 마지막으로 내소사를 방문하게 되었다 내소사는 86년 여름
휴가에 가족들과 호남고속도로를 달려 새벽 5시경에 찿아던 사찰이다 지금으로부터 37년 전이다 그때 새벽에
주차장에 차를 대고 바로 매표사가 있는 곳으로 들어갔을 때는 바로 사찰천황문이였는데 지금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잠시매표소에서 입장료 4,000을 내고 전나무가 이어진 숲길을 지나서 걸어오라가니 사천왕 전각이 나온다 문으로
들어서니 죄우에 사천왕 목상이 눈을 부릅뜨며 나의 마음을 압도한다 그리고 새롭게ㅔ 색이 되었는지 사천왕상 색상이
참 화려하다 디금본 사천왕상들 중 제일 화려한 것 같다
이어서 간단한 참배를 하고 더 오르니 커다란 고목 느티나무가가 수령 1000년을 넘게 버티고 있다 나무 주변의 안내판은 수령이 1000년 이상이라고 적혀있다 그리고 우측에는 사찰의 상징인 커다란 보리수나무가 서있고 옆에는 기와불사 접수처가 있어서 보살이 관리하고 계셨다
이어 우측으로 오르니 원형 나무가지를 가진 산수유나무에 노란 꽃이 피어 사찰 분위기를 압도한다 수령은 작아 보였지만 산수유나무가 조경이 잘 손질 관리 되어 누구나 호감이 갈 정도이다 그래서 사진을 여러 각도로 촬영해 보고 다시 루각밑을 지나는데 주춧돌이 모두 자연 그대로의 돌이어서 이 절의 역사를 알게 한다
루각을 지나자 빛바랜 대웅전의 웅장한 모습이 드러나며 바로 앞에 삼층탑이 모셔져 있다 그리고 대웅전 주춧돌도 모두 자연석이어서 더 친밀감이 와닿는다 대웅전 모신 하부 축대도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다 대웅전 우축에는 부엌이 이었는데 큰 무쇠솥과 식당의 곡간모습이 시골예전 집과 같아 참 보기 좋았다
이날 3/11 토용일 오후 4시 반대 이곳 내소사를 찾아온 이들이 상당히 많아 보인다 그리고 대웅전 법당 안으로 들어가 참배하고 대웅전 천정을 살펴보니 건축물이 안과 밖이 다포형으로 되어 다른 사찰과 특이함을 알게 되고 단청이 오래되어 모두 희미하다 그리고 이번에 이곳에 템플스테이을 온 외국여성을 이곳 스님이 안내자와 함께 사찰을 안내하였는데 옆에서
듣자 하니 대웅전 사찰을 오른쪽 측면 문으로 입장할 때는 왕발이 먼저 달아야 하고 측면 왼쪽으로 입장할 시에는 오른쪽발이 먼저 밟아야 한다고 설명한다 이 유인 쪽 맨 먼저발이 부처님을 향하여야 된다고 한다
이곳 내소사에 템플 스테이가 설치되어 외국인 및 내국인의 이용이 가능하다고 한다 나는 템플스테이를 지나 우측 아래길로 내려오는데 홍매화가 붉은 잎을 터뜨려 참 보기 좋다 그리고 그 아래 뒷간이 있는데 지금은 사용을 안 하고 전시용으로만 홍보한다고 설명되어 있다
이어서 나는 천왕문을 통해 내려오며 오래된 사찰 내소사가 참 예전 건물 치고는 오래돤 문화재가 있는 사찰임을 알게 한다 매표소에서 입구로 들어오는 길에 큰 전나무가 도열하여 우리를 안전하게 인도한다 그리고 군데군데 큰 태풍으로 전나무가 쓰러져 임시로 정리 바치되어 있다 내소사 바로 윗산이 관음봉이다 내소사와 관음봉이 일치하며 큰 조화를 이룬다
이 글을 작성하며 내소상에 대한 좀 더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 인터넷 백과사전에 찾아보니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내소사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의 말사이다. 원래 이름은 소래사였으며 633년(선덕여왕 2) 신라의 혜구(惠丘)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석포리에 상륙해 이 절을 찾아와 군중재를 시주한 일을 기념하기 위해 절 이름을 내소사로 바꿨다는 설이 있으나 사료적인 근거는 없다.
이 절에 관한 기록은 〈동국여지승람〉과 최자의 〈보한집 補閑集〉 가운데 정지상이 지은 〈제변산소래사 題邊山蘇來寺〉라는 시가 있고, 이규보의 〈남행일기 南行日記〉가 있는데 모두 '소래사'로 기록되어 있어 언제 '내소사'로 바뀌었는지 분명치 않다. 1633년(인조 11) 청민(靑旻)에 의해 중건되었고 1902년 관해(觀海)에 의해 수축된 뒤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이 절에 있는 중요문화재로는 고려동종(보물 제277호), 법화경절본사경(보물 제278호), 대웅보전(보물 제291호), 영산회괘불탱(보물 제1268호)이 있고 그밖에 설선당·보종각·연래로·3층석탑 등이 있다.
잡석으로 쌓은 비교적 높은 축대 위에 낮은 기단을 두고 자연석의 초석(礎石)을 배치했으며, 그 위에 기둥을 세웠는데 모서리기둥[隅柱]만 배흘림이고 나머지는 곧은 원기둥[圓柱]이다.
앞면의 기둥 사이에는 중앙칸에 사 분합(四分閤) 문을, 좌우칸에 분합문을 달았는데 문짝은 초화무늬[草花紋]가 정교하게 투각 된 꽃살문이다. 처마를 받친 공포는 다포계로 중앙칸에 3개, 좌우칸에 2개씩 배치되어 모두 11개의 공포로 결구되어 있다. 외3출목·내5출목으로 전통형식에서 벗어나 있으나 쇠서 [牛舌]들이 겹겹으로 중첩되어 뻗어 나와 있는 공포의 구성은 조선 중기 이후의 다포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건물 내부의 5개 출목에 걸쳐진 살미첨차에는 모두 연봉형을 새겼으며 소위 운궁이라는 장식적 형태로 변모되어 있다.
대들보는 앞뒤 기둥 위의 공포에 걸쳐졌는데 자연 그대로의 굽은 재목을 사용했다. 대들보 위에 동자형(童子形)의 대공(臺工)을 세워 마룻보[宗樑]를 받치고 우물천장을 가설했다. 대들보에서 건물 측면의 가운데 기둥에 걸치도록 각각 2개씩의 충량을 배치했다. 건물 내부의 뒤쪽에는 두 기둥을 대들보에 고정시켜 세우고 그 사이를 후불벽(後佛壁)으로 만들었다. 불단 위에는 아미타구품인을 한 불좌상과 좌우에 보살좌상을 안치했고 그 위에 닫집을 따로 설치하지는 않았다. 건물은 그다지 큰 편이 아니며, 평면은 중후한 방형을 이루고 있는데 이에 비해 기둥 높이가 낮아 단정한 느낌을 준다.
고려시대에 제작된 동종. 1222년 작. 보물 제277호. 높이 103cm, 입지름 67cm. 내소사에 있으나 원래 변산반도에 있던 청림사의 종이다. 청림사가 폐사되고 땅속에 묻혀 있던 것을 1850년(철종 1) 현 위치로 옮겨왔다.
종의 입구[鐘口]가 종의 몸체[鐘身]보다 약간 넓고, 정상부에는 생동감 있는 용조각으로 된 고리[龍]가 있으며 그 옆의 원통기둥인 요통에는 구슬이 둘러져 있다. 종의 어깨 위에 연화를 내포한 여의두무늬의 꽃장식이 2겹으로 있는데, 용통 위의 구슬장식과 함께 고려종의 특색을 보여준다. 종 어깨와 종 입부분에 문양대를 두어 모란당초무늬를 돋을새김 했다. 4개의 유곽 주변의 문양대는 종의 어깨부분 문양대보다 조금 좁으며 연주무늬와 당초무늬를 양각했다.
유곽 속에는 각각 9개의 꼭지가 있는데 모두 연꽃 모양의 둥근 받침에서 돋아난 꽃봉오리 모양이다. 유곽 밑에 있는 당좌는 종을 치는 부분으로 연화 형태인데 자방을 중심으로 잎이 좁은 연잎이 많이 달려 있다. 종 몸체 중간에는 4곳에 활짝 핀 연꽃이 떠받치는 구름 위에 삼존불상을 돋을새김했다. 본존은 연화좌 위의 좌상이고 양협시보살은 입상이다. 모두 둥근 두광을 갖추었고 광배에서 피어오른 서운이 길게 꼬리를 날리고 있으며, 그 위에는 수식이 바람에 나부끼는 천 개까지 표현되어 있다.
이 종은 전체 형태나 조각이 아름다운 작품으로 고려종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종신에 "貞祐壬子六月初七日邊山靑林寺金鐘鑄成入重七百斤"과 "餘己酉九月七日卜居靑林翌年九月七日鑿此金鐘移懸于來蘇寺"라는 명문이 있어 종이 청림사에서 만들어진 후 내소사로 옮겨진 경위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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