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이어 연일 강한 한파가 주말로 이어진다고 기상청은 예보한다 춥고 강한 한파
이어져 년말과 새해로 이어 지는 여행객들은 걱정을 하게한다 다행이 큰 눈은 없어서
그나마 안심이다 이제 시기적으로 추운 겨울 본격 시동이다
ㅇ*첫번째 해설자 설명
서울에 자주 오면서도 아직도 종묘 위치를 모르다가 종묘를 찿게 되니 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니 지하철1호선 종로3가역에서 하차 하여 8번출구로 나가라고 한다 모르는 낮선것의 여행은 인터넷 길찿기를 이용하면 너무 편리하고 빠르다
*입구 연못섬의 향나무
심지어 지하철의 몇 번째칸에서 내려서 찿아 가면 가장 빠르게 접근하게 된다는 친절한 안내에 모적지 이르는 구간 거리 시간을 자동차와 지하철 ,도보순으로 잘 정리해 놓아 인터넷지도 찿기를 자주 이용한다 우리는 참 편리한 시대에 살고있다
*제법 오래도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ㅏ
지하철1호선 8번출구를 나오니 조금한 골목과 함께 동쪽으로 종묘 돌담이 보인다
60이 되어 난생 처음 오늘 종묘을 찿아 입장표(성인1,000원)매표 하고 들어 서니 때
마침 여성 문화해설사가 이 추운 겨울날 오후4시20분 안내를 시작한다
*제를 지내기위해 12지색 어의를 입고 대기하던 "제궁일원"
종묘는 유학을 통치기반으로 하여 건국한 조선왕조가 역대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봉행하던 곳이다 또한 종묘는 건물과 더불어
제레악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종묘는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
으로 등제되었고 종묘제레및 종묘제레악은 2001년에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제
되었다고 첫번째 해설장소에서 역사문화해설자가 말씀하셨다
이어 해설사는 향대청일원앞에서 제레음식을 준비 하던곳과 신과 왕이 다니는 길
통로를 다니지 않도록 주위를 주지 시켰다 그만큼 이곳 종묘가 신성하고 경건한
장소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건축물도 숭고하고 고전적인 건축미를 갖추고 있다
*전사청 앞에서 제레와 왕의신과왕비신 배치에 대하여 해설을 들으며........
*정전으로 들어가는중
3번째 해설 장소인 재궁일원에서 왕 의를 걸치고 12색 곤룡포을 입고 마음을 정갈
하게 하기위해 이곳에서 목욕 단정하게 신에게 예의를 다하였다고 한다 원레 종묘는
유교와 더불어 중국에서 전례되었는데 중국도 종묘가 없어지고 우리나라에서만 유독
보존 관리되고 있다고 한다
*정전 건축물 긴건축물이 인상적이다
종묘에서 가장 큰 건물은 정전이고 다음으로 작은규모의 영양전이 위치하고있다
종묘경내에는 400년 이상된 신갈나무 와 소나무 기타나무등이 어울어져 도심속
자연경관을 잘 가추고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정전의 서측면 풍경
*정전의 동쪽 풍경
정전에서의 해설을 듣고 양영전으로 가 해설을 듣고 내려가는 양쪽 우거진 숲길이
역사의 장소임을 알게 되고 이러한 유역이 문화제로 되어 보호 받게 되어 도심속
작은숲 종묘가 있다는것이 얼마나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알게한다
*양영전으로 이동중에...........
날씨가 너무 추운데도 불편없이 친절하게 설명해준 여자 해설사님의 한마디 한마디가
얼마나 소중한지 감사의 박수를 쳐드리고 이내 경내를 나와 보니 바로이곳 입구가
청계천 새운상가가 나온다
그리고 종묘에 대하여 더 궁금증이 유발되어 인터넷배과사전에 찿아 보니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종묘
사적 제125호. 종묘는 원래 정전(正殿)을 말하며, 태묘(太廟)라고도 한다. 태묘는 태조의 묘(廟)가 있기 때문이다. 역대 왕과 왕후는 사후에 그 신주를 일단 종묘에 봉안하였다
*양영전의 서측
*양영전 동문
공덕이 높아 세실(世室 : 종묘의 神室)로 모시기로 정한 제왕 이외의 신주는 일정한 때가 지나면 조묘(祧廟)인 영녕전(永寧殿)으로 옮겨 모셨다. 이것을 조천(祧遷)이라고 한다. 종묘 즉 정전에는 현재 19실(室)에 19위의 왕과 30위의 왕후의 신주를 모셔놓고 있다.
정전 서쪽에 있는 영녕전에는 정전에서 조천된 15위의 왕과 17위의 왕후, 그리고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의 신주를 16실에 모셔 놓고 있다. 정전의 신실은 서쪽을 상(上)으로 해 제1실에 태조의 신주가 봉안되어 있다. 영녕전은 주나라의 제도를 본받아 정중(正中)에 추존조사왕(追尊祖四王)을 모시고 서쪽과 동쪽으로 구분, 서쪽을 상으로 차례대로 모시고 있다.
이것을 소목 제도(昭穆制度 : 신주를 모시는 차례로, 왼편을 昭, 오른편을 穆이라 하며, 天子는 1세를 가운데 모시고 2·4·6세를 소에, 3·5·7세를 목에 모시는 제도)라
한다.유교 사회에서는 왕이 나라를 세우고 궁실(宮室)을 영위하기 위해 반드시 종묘와 사직(社稷)을 세워 조상의 은덕에 보답하며 경천애지사상(敬天愛地思想)을 만백성에게 널리 알리고, 천지 신명에게 백성들의 생업인 농사가 잘되게 해 달라고 제사를
올렸던 것이다
따라서, 왕이 도읍을 정하면 궁전 왼편에 종묘를 세우고 오른편에 사직을 세우게 하였다. 조선을 창건한 태조는 송경(松京 : 松都)에서 한양으로 천도한 뒤 현재의 종묘와 사직을 세웠다
종묘의 기원은 중국 우(虞)나라 때 시작, 은(殷)·주(周)대까지는 각각 7묘제(7대조까지 묘에 봉안)로 하였다가 명나라 때는 9묘제로 바뀌었다. 우리 나라는 신라 시대는 5묘제, 고려 시대는 7묘제로 하였고, 조선 시대 초기에도 7묘제로 하였다. 즉, 7대왕 이상의 신주는 영녕전으로 조천하게 되어 있었다.
*종묘앞이 바로 세운상가 간판이 보인다
그러나 치적이 큰 왕은 만세 불후(萬世不朽)·조공 숭덕(祖功崇德)의 근본 이념에 따라 7대가 지나도 부조위(不祧位)인 정전에 모셨고, 조천된 신주는 영녕전에 봉안하였다종묘의 건축은 중국의 제도를 본떠 궁궐의 좌변(左邊)에 두었다.
조선을 창건한 태조는 1394년(태조 3) 8월 종묘 터를 보았고, 9월 감산(坎山)을 주산(主山)으로 하는 임좌병향(壬坐丙向)한 그 곳에 종묘 터를 결정하였다. 12월부터
영건(營建)을 시작해 다음해 9월에 일차 영건이 끝났으며, 그 뒤 1546년(명종 1)까지 계속되었다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자, 1604년(선조 37)부터 중건이 논의되어, 선조 41년 터를 닦고 기둥을 세우는 등 공사를 개시한 후 광해군이 즉위하던 해인 1608년 5월 중건되었다. 그 뒤 몇 차례의 개수와 증건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정전은 국보 제227호, 영녕전은 보물 제821호로 지정되었다
궁장(宮墻)으로 둘러싸인 넓은 대지의 남쪽 끝에 자리한 정문을 들어서면 정전에 이르는 주 도로가 왼쪽인 서쪽으로 나고, 오른쪽인 동쪽으로 굽어진 길 옆에 향관청(享官廳)이 자리잡고 있다. 향관청을 지나면 재실이 있는데, 이곳은 정문에서 정전에 이르는 주 도로에서 꺾어 들게 되어 있다.
재실의 서측에 종묘 정전이 자리잡고, 그 서측으로 영녕전이, 정전 서남쪽으로 악공청(樂工廳)이 있다. 정전이 자리한 곳은 장방형으로 담장을 둘러쌓았는데, 남측 담장 중앙에 정전 대문을 달고 양 쪽 동서 담장에 측문을 달았다.
정문을 들어서면 넓은 월대(月臺 : 정전 앞에 있는 섬돌)가 있고 정문 중심과 이 월대의 중앙을 잇는 어도(御道)가 정전의 기단(基壇) 중앙 계단까지 연결되어 있다.
정전은 현재 정면 19칸, 측면 3칸이고, 좌우 익실(翼室) 각 3칸이지만, 본래에는 태실(太室) 7칸, 좌우 익실 각 2칸이었던 것을 여러 번 증축하였다.
장대석으로 쌓은 넓은 월대를 앞에 두었는데, 그 상면은 박석(薄石)을 깔았고, 어도는
전(塼)을 깔았으며, 곳곳에 차일(遮日)고리가 박혀 있다. 기단은 장대석 바른층쌓기로 하고, 이 위에 주좌(柱座)를 둥글게 다듬은 돌 초석을 놓아 두리기둥[圓柱]을 세웠다. 기둥 위에는 주두(柱頭)를 놓고, 익공(翼工 : 檐遮 위에 얹혀 있는 짧게 아로새긴 나무) 두 개와 첨차(檐遮 : 三包 이상의 집에 있는 꾸밈새)로 짜 이익공식(二翼工式)을 이루며, 처마는 홑처마에 맞배지붕을 이루고 있다.
전면 반 칸은 퇴(退)로 모두 개방하였고, 각 칸마다 큰 판장문 두 짝씩을 안여닫이로 달았는데, 중앙 칸에는 밖으로 빗장을 달았다. 툇간과 각 실 바닥은 강회다짐이고, 천장은 넓게 방형으로 귀틀을 짜고 그 위에 판장으로 천장을 해 칸이 넓은 우물 천장이 되었다. 측면과 배면은 모두 전으로 두껍게 벽체를 쌓았으며 처마는 홑처마에 맞배지붕을 이루었다.
용마루와 기타 마루에는 양성을 하고, 취두(鷲頭)와 잡상(雜像)들을 늘어놓아 장식하였다. 정전의 정문 담장 안 동쪽에는 공신당(功臣堂)이 정면 16칸, 측면 1칸 크기로 홑처마 맞배집으로 서 있다. 영녕전 또한 장방형으로 담장을 둘러치고, 정문과 좌우 측문을 둔 속에 넓은 월대를 앞에 두고, 주실(主室) 정면 4칸, 측면 3칸, 좌우 익실, 동익실 정면 6칸, 측면 3칸, 서익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크기로 자리잡고 있다.
장대석으로 쌓은 월대는 정전 월대와 같은 모양으로 박석으로 마무리하였고, 기단 또한 장대석으로 높이 쌓았다. 이 위에 주좌를 둥글게 마무리한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다. 기둥 위에는 주두를 놓고, 익공과 첨차로 결구, 이익공식을 이루고 있다. 전면 1칸은 툇간으로 개방하고, 그 안쪽 각 칸마다 두 짝의 안여닫이 판장문을 달았는데, 중앙 1칸은 빗장을 달았다.
툇간과 각 실의 바닥은 강회다짐이고 천장은 정전과 같이 귀틀을 우물 井자 모양으로 짜고 널판을 깔았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맞배지붕을 이루는데, 지붕마루는 양성을 하고, 취두와 잡상을 늘어놓았다. 특히, 영녕전의 뒷 벽은 초석과 두리기둥 부위는 판장으로 구획하고 나머지를 전으로 벽체를 쌓아, 힘을 받는 부분과 단순한 벽체부를 구조적으로나 시각적으로 분리한 수법을 볼 수 있다.
종묘내에 만든 어도들은 중앙이 높고 좌우가 낮게 박석을 깔아 만들었으며, 정전과 영녕전의 담장 밑에는 빗물을 담장 안에서 흘려 내보내기 위한 석루조(石漏槽)들을 두었다.
이와같이 종묘는 현장을 확인하여 관람하다 보니 규모도 크고 엄숙하고 유교사상의
지배와 우리의 제레문화를 다시 한번 확인해보는 계기가 되었고 종묘의 유네스코세계
문화유산이 된것에 다시 한번 찬사를 보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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