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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히포크라테스 ‘선서’만 있고 ‘정신’은 없다 / 강신익

한마음주인공 2009. 6. 29. 14:06
[의학속사상] 히포크라테스 ‘선서’만 있고 ‘정신’은 없다/강신익
“인류봉사에 생 바치겠다” 선언해놓고
현실 속 의사들은 잇속 차리기 바빠
‘의학사상’ 제대로 소화 못한 탓
신화·역사·과학 어우러진 동·서양의학처럼
우리 의철학도 ‘인문학 수혈’ 받아야
한겨레
▲ 네덜란드 네이메헌 의과대학 교정에는 히포크라테스의 조각상이 없다. 대신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스클레피오스(왼쪽)와 히게이아(오른쪽)의 조각상이 건물 양쪽에 서 있다. 여기 유럽의철학회 본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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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속 사상/(24) 한국 의철학의 과제

우리나라의 모든 의과대학 교정에는 히포크라테스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그 밑에는 “나의 생애를 인류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노라”로 시작하는 유명한 선서가 새겨져 있다. 이 선서는 의사를 비롯한 모든 의료인의 행동을 규율하는 세계 공통의 규범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잘못을 저지른 의사를 나무랄 때는 예외 없이 이 선서가 들먹여진다. 여기에 의술은 본질적으로 인술(仁術)이라는 동아시아 전통의 가치가 덧붙여진다. 의업은 본질적으로 신성하며 모든 의사가 이 가치에 봉사할 것을 명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이러한 이상과는 거리가 멀다. 의약분업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논란과 의사들의 파업 투쟁, 한의사와 약사, 의사와 한의사간의 직역 다툼, 상업적 의료의 급속한 확산 등은 우리가 더 이상 2500년 전의 가치에 무조건적으로 헌신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현실과 이상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사태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가 지나온 각 시대와 공간의 의학 속에 들어있는 사상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니 어쩌면 보편적 과학인 의학에 무슨 사상이 있겠냐고 되묻는 우리 시대의 문화적 천박성에 더 근본적 원인이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언제 한번이라도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담긴 시대상을 진지하게 검토해본 적이 있는가? 그런 선서가 나오게 된 역사적 배경이 무엇인지, 당시의 상황과 지금의 현실은 어떻게 다른지, 그것이 우리의 문화와 시대적 현실에 어떻게 접목될 수 있는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는가? 관례에 따라 조각상을 세우고 반성 없이 선서를 낭독하는 무미건조한 형식주의로는 절대로 이런 상황을 극복하지 못한다. 우리 의학이 인문학의 수혈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 증인은 ‘신’


하지만 우리와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외국의 학자가 쓴 교과서로 역사와 윤리를 가르친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우리 나름의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서구인들의 경험과는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서양의학이 우리 의학의 주류가 된지 오래고 사회의 모든 부문이 서구화한 마당에 무슨 전통이 필요하겠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싫든 좋든 서양의학과 한의학이 공존하고 있고 갈수록 비정통 의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가는 상황에서 이와 같은 반성은 필수적이다.

이러한 작업은 대체로 1) 의학의 역사 속에서 객체적 사실을 찾아내고(의학사), 2) 그 속에서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의 사유양식을 읽어내며(의학사상사), 3) 그것을 지금의 현실에 비추어 재해석하는(醫哲學) 단계로 이루어진다. 우리의 경우 서양의학과 한의학 모두가 이러한 반성의 대상이 되며 따라서 세 번째 단계인 의철학의 과제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짧은 글에서 이 과제를 수행할 수는 없으므로 먼저 동ㆍ서 의학의 사상적 전통을 간략히 되짚어보면서 우리 의철학의 과제가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내가 방문했던 유럽의 의과대학에는 히포크라테스의 조각상이 없었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의학의 남신 아스클레피오스와 위생의 여신 히게이아의 상이 건물 양쪽에 서 있을 뿐이었다. 첨단의 과학적 의학을 선도한다는 유럽의 의과대학이 미신을 타파하고 자연의학을 세운 히포크라테스 대신 허구와 상상으로 만들어진 신화를 내세우다니!!

▲ 동아시아 의학의 뿌리라 할 수 있는 황제내경의 주인공 황제(黃帝)의 상상도.
이런 의문은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원문과 르네 듀보의 <건강유토피아>를 읽은 다음 말끔히 해소되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첫머리는 바로 이 신들이 신성한 선언의 증인임을 밝히고 있었으며, 듀보는 서양의학의 역사가 바로 이 두 신들이 우열을 겨루면서 상호작용해 온 역사임을 담담히 밝히고 있었던 것이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질병과정에 개입하여 그 경과를 바꾸는 역할을 하지만 히게이아는 병에 걸린 사람이 그 병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위생과 보건의 수호신이다. 현대적 의미에서 볼 때 전자는 치료의학을 대표하고 후자는 예방의학과 보건학을 대표한다고도 할 수 있으며, 동양적 사유문법으로 번역하면 전자는 양이요 후자는 음이다. 양이 성하면 음이 쇠하고 음이 성하면 양이 쇠하기 마련인데 듀보는 놀랍게도 서양의학의 역사가 이러한 상보적 관계에 따라 변해왔다고 보고 있으며, 나이미겐 의과대학 교정의 풍경은 이러한 역사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과학만이 임상 근거인양 수입돼

여기서 우리는 신화와 역사, 그리고 과학이 기묘하게 어우러지면서 이어지는 서양의학의 모습을 본다. 신화적 상상력은 자연의학의 선구인 인간 히포크라테스를 신전의학(神殿醫學)의 주신(主神) 아스클레피오스의 후손으로 기록한 역사에서도, 첨단과학의 전당인 21세기 의과대학에서도 그 빛을 잃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이처럼 그들은 신화-역사-과학의 연속성을 사유하면서 자신들의 의철학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동아시아의 의학 전통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고대 중국에는 황제(黃帝), 신농(神農), 복희(伏羲)와 같은 전설적 황제가 있어 의술, 약초, 길흉을 관장했다. 이들은 서로 우열을 가리지는 않았지만 이 중 황제만이 정교한 의학이론을 남겨 후세에 전하므로 서양의 히포크라테스와 비교되곤 한다. 그 둘은 모두 초자연적 힘에 의지하지 않고 자연적 현상으로 질병을 설명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론의 구조는 달랐지만 영웅적 치료법이 아닌 온화한 방법을 선호한다는 점도 같다. 그들의 이야기는 신화가 아닌 전설이지만 그것이 역사로 기록되고 지금도 실제 임상에 응용된다는 점은 서양의학의 신화-역사-과학의 구도와 일치한다. 전설-역사-임상의 연속성이 유지되고 있으며 이것이 바로 동아시아 의철학의 근거가 된다.

19세기 말 서양의학이 들어오면서 이러한 연속성이 심각한 위기를 맞는다. 신화와 전설, 과학과 임상이 부딪히면서 심한 불협화음을 만들어낸다. 과학이 임상의 유일한 근거가 되면서 전설과 역사가 부정된다. 1934년 9개월이나 지속된 양ㆍ한방 사이의 지상 논쟁은 이러한 불협화음의 소산이다. 하지만 그 논쟁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허구한 날 머리띠를 동여매는 이 땅의 의사와 한의사들이 너무 안쓰러워진다. 72년 전 논쟁 속에서는 그나마 수준 높은 철학과 이 땅을 살아가는 민중의 건강을 걱정하는 진정성이 느껴지지만,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 지금의 의료인이 벌이는 투쟁에서는 ‘인류봉사’의 의지가 전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양쪽의 대립을 다루는 신문기사의 제목이 “또 싸운다 또!”였을까? 싸울 때 싸우더라도 무엇 때문에 싸워야 하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 이유를 알아내고 진정한 의(醫)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이 오늘 여기에 서 있어야 할 의철학의 과제 중 하나다.

의철학은 ‘진정한 의’ 그려내야

▲ 강신익/인제대 교수·의철학
우리 의철학의 모습이 서양인의 그것과 같아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서양의 과학적 의학을 받아들이기는 했어도 우리는 그보다 훨씬 더 오랜 전통과 문화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서양의학의 역사와 전통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되 반드시 우리의 전통을 그 배경으로 해야 한다. 의철학을 의학철학으로 옮기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우리 전통에서의 의(醫)는 학문적 체계(의학)만을 뜻하지 않는다. 의(醫)는 학문(醫學)과 실천적 지혜(醫術)와 덕스러운 마음가짐(醫德)으로 완성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셋을 함께 녹여낼 용광로이지 의학이론과 기술과 행동강령을 따로 떼어내 입력하고 계산할 컴퓨터가 아니다. 의철학은 이러한 용광로가 되고자 한다.

출처 : 한겨레신문 http://www.hani.co.kr/arti/BOOK/112382.html

 

출처 : 건강한 삶을 위하여
글쓴이 : 너럭바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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