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해풍김씨 대종회 제45차

한마음주인공 2025. 3. 1. 21:43

오늘 3.1절은 우리 해풍김 씨 대종회가 열리는 날이다  장소는 지하철 1호선 성균관역 다음인 화서역이다 

일단 전 대종회장님(운규님)으로 부터 장소를 알아보니 화서역 4번 출구로 나와 바로 횡단보도가 있는

건물이라 하셔서  해풍김씨 대종회가 열리는 9층  회관에서 내가 도착한 시간이 오전 10시 반인데도

많은 종친 회원분들이 전국에서 골고루 모여 계셨다 

 

 

 

 

일단 회장님과 임원단이 게신곳으로가 현재 대종회 회장님이신 진방님과 용모님 운규 님을 찾아가 머리 숙여

인사드리고  그동안의 안부를 교환했다 내가 그동안 코로나와 개인사정으로 종친회에 안가지 3년이 지나고

있어 원로 회장님과 임원분들의 모습도 많이 달라져 가고 있음을 알게 한다 

 

제45차 정기총회 대종회 회장 진방님 20250301

 

 

 

 

각 지회 지부장님 20250301

 

 

일단 대종회의장 입구에서 연회비를 납부하고  중앙자리에 자리잡고  해풍김 씨 대종회 제45차 정기총회

회의자료를 살펴보고 있는데 저와 대각으로 머리 김천옆 황간에서 오신 황간 김상파 의규 님과 인사 나누고

11시 15분경 정기총회가 개의하여 회장님 인사말씀과 경과보고 감사보고 임원선출 연장 기존 2년에서

3년으로 회장님 및 간사님들의 임기도 연장하기로 합의를  하고 모든 안 것이 문제없이 통과되었음을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해풍김씨 대종회 정기총회 자료 20250301

 

 

 

 

대종회 정기총회 순서 20250301

 

 

 

항상  종찬 회의에 참석하는 것은 해가 갈수록 참석 인원들이 줄어들고 대학입학 장학금 수여자도 줄어드는 것 같고 

올해는 2명이 입학증서와 장하금을 수여받았다  그래도 오늘 해풍김 씨 제45차 대종회가 원만하게 치러지고

종친 여러분들이 우리 해풍김씨 발전에 한마음으로 함께 하는 것이 정말 행복했다 

해풍김씨 연혁 20250301

 

 

 

 

그리고 이제 연로하신 대종회 참여분들이  얼굴이 보이자 않아 예전 원로님들이 모습이 그리워지게 된다 

내가 아버님으로부터 참여권유를 받아 우리 해풍김 씨 대동회 처음 참여한 것은 1981년 준규님이 회장에 선임하는 

총회에 아버님과 함께 첫 참여를 하게 되었다  물론 창림당시 열기는 대단했다

 

해풍김씨 세손 분파도 20250301

 

 

 

 

 

 

 

이어 대종회 총회에 다수 참여하며 우리 종친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의리 해풍김 씨도 참 대단한 가문이라는 생각을 

여러 번 가지고 나는 우리 해풍김 씨의 큰 업적을 갖고 문종에서도 많은 종친이 계신 쌍부파 발안 화산리 대종가를 

돌아보기 위해  큰아버지, 아버님 성모, 인모, 연수, 연호, 선영들의 묘소를 돌아보려고 우리 선조님들의 큰 공을

다시 한번 새 기계 되었다  지금도 영자 할아버님의 묘소를 잘 기억하고 있다 

 

 

 

대종회 정기총회 시작전 20250301

 

 

나는 다시 2차로 1991년 5월 우리 가족들을 모시고 DMZ 안 대성리에 살고 계시는 관곡파 종친들을 만나기 위해 사전 연락을 하여임 진강을 넘어 군 차량의 호의를 받으며 대성리 마을 종친댁을 방문화 개성과 인접한 우리 가족의 터전이었던 산귀리에 가깝게 가보기도 했다 이처럼 우리 해풍김 씨 대종회를 해마다 맞이하며 정말 우리 대종회의 과거 종친들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해풍인의 기 지을 확인하게 되었다 

 

 

대종회 공로자 20250301

 

 

오늘 제45차 해풍김 씨 대종회 정기총회를 맞이하며  다시 한번 우리 종친 원로님들의 거룩하고 훈훈한 정신력을 이어받아

타 종친들의 대동회 보다 규모는 작지만 우리 해풍인 안에 숨어있는 해풍인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독립정신을 다시 한번 

해풍김 씨 이름으로 희망차게 전진하기를 기대해 본다 

 

제45차 해풍김씨 대종회를 마치며 기념 촬영 20250301

 

 

 

그리고 이번 해풍김씨 대종회 정기총회를 성실하게 준비해 주신 대종회장님과 임원 여러분 들에게 깊은 감사와 고마움을 

전해드리고 싶고 우리 해풍김 씨 대종회가 활기차게 뻗어 나가도록 해풍인 모두가 정진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해마다

3.1절에 개최하여 대종회가 되어 아무리 머리 있어도 3.1일 삼일절이 되면 대한민국 해풍김 씨대종회가 아마도 유일하게

개최하여 타종친의 대종회 보다 우수하고 해풍김씨 대종회가 한마음으로 나가기를 기원해 봅니다  

 

 

끝으로 이 글을 쓰면서 우리 해풍김 씨에 대해여  좀더 알고싶어 인터넷 해풍김씨 대종회 사이트 에 찿아보니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대종회 임원재선출 순간 20250301

 

 

해풍김씨 연원(海豐金氏 淵源)

시조(始祖) 김숭선(金崇善) 공은 고려조(高麗朝)에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예부상서(禮部尙書) 해풍부원군(海豐府院君)에 봉(封)해 지시고 그 자손들이 본관(本貫)을 해풍(海豐)으로 하고 있다.

  3 세(世) 대(岱) 공(麗朝 평장사) 전후의 문헌이 여러 번의 변란으로 소진되어 사적을 자세히 상고할 수 없다.

 

대종회 종친 분들 20250301

 

 

 

 

 해풍의 지명변천사를 살펴보면 고구려 때에는 정주(貞州). 하원(河源)이라 하고 고려조에서는 개성부(開城府) 승천부(昇天府) 해풍 군(海豐郡)이라 하였으며 조선조 세종 24년에 해풍과 덕수(德水)를 합하여 풍덕부(豊德府)라 하고 순조 23년(1823)에는 개성부에 속하고 별호(別號)로 덕수(德水) 하원(河源) 정주(貞州)라 칭하였으므로 해풍김 씨 후손 중에는 세거지(世居地)의 별호를 채택하여 8 세손 김수연(金壽延) 공을 1세로 하는 덕수김 씨(德水金氏)와 10 세손 김수(金守) 공을 1세로 하는 정주김 씨(貞州金氏)가 있으며 이들은 모두 해풍김 씨(海豐金氏)의 동원동족(同源同族)이다. 조선조 고종2년(1865)에 해풍김씨 제3차 을축보(乙丑 譜) 간행 시 덕수김 씨는 개성야교파(開城野橋派)이고 정주김 씨는 개성돈암파(開城 遯庵派)이다.

  

대총회 회의 20250301

 

 

 

   해풍김씨 덕수김 씨 정주김 씨의 세거지명(世居地名)

서울특별시 일원, 경기도 화성시 개성시 개풍군 장단군 강화군, 강원도 화천군 춘천시, 충남 대전시, 전라도 광주시 고창군, 제주도 제주시, 황해도 사리원, 함경도 단천 군 안변군, 평안도 강계군 선천군.

 

대종회 부폐식단 20250301

 

 

 

 정부 통계청에서 2015년 기준으론 해풍 10,934명, 덕수 3,438명, 정주 2,376명으로 변화하였고, 총인구는 16,748명으로 소폭 증가하였다..

자료: 해풍김 씨 대동보, 세덕록, 한국성씨총감(해풍김 씨 편)

 

 

우리 가문 (淵源)

  우리의 시조할아버님의 휘(諱)는 숭(崇)자 선(善)자이시며, 고려 공민왕때 예부상서로 계시면서 친원(親元)에서 친명(親明)으로 바뀌는 배몽시기(排蒙時期: 1362~1368)때 나라 정책을 바꾸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시고 그 공훈으로 금자광록대부예부상서 해풍부원군(金紫光祿大夫 禮部尙書 海豐府院君)에 봉작(封爵)되시면서 우리는 본관(本貫)을 해풍김씨(海豐金氏)라 칭하게 되었다. 

 
시조께서는 아들 휘 천일(天一)공을 두셨는데 고려조에서 지후(祗侯)벼슬을 지내셨으며, 손(孫)은 휘 대(岱)공으로 고려조에서 문과(文科)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시고 정부의 최고기관인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에서 왕의 조칙(詔勅)을 받들어 심사하는 평장사(平章事) 시랑(侍郞:정2품)을 역임하셨다.
 
  시조님의 생(生) 졸(卒) 연월일은 알 수 없으며 묘소는 고려 개성의 왕성밖 남쪽 15리쯤되는 개풍군 상도면 대능리 궁동(開豊郡 上道面 大陵里 宮洞)에 있다고 세보(世譜)에 기록되어 있으나 계대(系代)와 행적(行蹟)을 상고 할 만한 문헌이 여러 번의 병화(兵火)로 실전(失傳)되고 묘(墓) 역시 실전(失傳)되어 여러 대에 걸쳐 찾으려고 노력하였으나 알지 못하다 순조(純祖)29년(1829) 봄에 남양쌍부파(南陽雙阜派) 19세 형조판서 휘(諱) 영(煐)공께서 풍덕 왼쪽 울릉동(蔚陵洞)에서 하늘의 도움으로 시조할아버님의 묘를 찾으셨다.
 
  공께서는 지명이 능동이라 하거늘 이를 기이하게 여기시고 여러 마을 사람들을 찾아가서 물으니 마을사람들이 이 산위에 큰 무덤 셋을 가리키며 이것이 고려조의 해풍부원군 묘라 이르기에 수하에게 명하여 묘를 파보게 하니 맨 윗 무덤에서 해(海)자 김(金)자 숭(崇)자 세 글자의 지석(誌石)을 찾으시고 다른 글자는 깨지고 부서져서 자획(字劃)을 알수가 없고 그 아래 두 무덤은 믿을 만한 근거가 없었다 한다.
 
  지석의 해는 海豐이요, 김은 성(姓)이요, 숭은 휘자 숭선(崇善)이니 우리 시조의 묘 임이 의심 할 바 없다. 이해에 경향 각지의 종친에게 통보하여 재물을 모아 봉분(封墳)을 다시 쌓고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판서 휘 영(煐)공께서 비문을 짓고 쓰시어 다음해인 1831년 봄에 비석과 상석등 석물을 갖추시고 효성스럽게 제사를 올리고 춘추제향(春秋祭享)을 받들어 왔으며, 고종10년(1873)에는 황간금산파 21세 휘 석(奭)공이 비문을 짓고 남양쌍부파 22세 휘 태욱(泰郁)공이 비문을 써서 묘비를 크게 개립(改立)하였다.
 
  시조할아버님 시제는 음10월5일로서 1950년 6.25동란 이전까지는 개성 묘소에서 시제를 봉행하였으나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된 이후로는 묘소가 북한에 귀속하게 되어 이곳 남한에서는 갈수가 없게 되었다.
 
  1983년 이후 대종회에서는 본래의 시제일인 음10월5일앞 일요일을 택하여 남한땅에서 시제를 봉행하던중 1991년에 시조할아버님의 영정(影幀)을 고증에 의하여 영상(影像)하고 대종회 사무실 상좌에 영정각(影幀閣)을 짓고 봉안하고 있으며 화성군 우정면 화산리 일원에 소재하는 남양쌍부파 묘당(廟堂)에는 영정사진을 봉안하고 이곳에서 시제를 봉행하고 있다.
 
  해풍(海豐)은 현재의 경기도 개풍군(開豊郡)으로 북한에 위치하고 있다. 해풍의 지명(地名) 변천(變遷)을 살펴보면 고구려시대에는 정주(定州) 하원(河源)이라 칭하고, 고려조에 와서는 8대왕 현종(顯宗)9년(1018)에 개성현에 속하고, 11대왕 문종(文宗)17년(1063)에 개성부에 속하고, 16대왕 예종(睿宗)3년(1108)에 승천부(昇天府)로 개칭하고, 26대왕 충선왕(忠宣王)2년(1310)에 해풍군(海豊郡)이라 칭하게 되었다.
 
  조선조 3대왕 태종(太宗)13년(1413)에 개성부에 속하고, 태종18년(1418)에 다시 해풍군이라 칭하였다. 4대왕 세종(世宗)24년(1442)에 해풍군과 덕수현(德水縣)을 합하여 풍덕부(豊德府)로 하고, 23대왕 순조(純祖)23년(1823)에 개성부에 속하고, 별호(別號)로 덕수 하원 정주라 칭하였다.
  26대왕 고종(高宗) 광무(光武)10년(1906)에 군(郡)이 되고, 일제치하(日帝治下) 1930년에는 개성부외의 땅을 합쳐 개풍군(開豊郡)이라 칭하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우리가 본관을 해풍(海豐)이라 칭하게 된 것은 시조할아버님께서 해풍군(海豐郡)에 거주하시면서 해풍부원군(海豐府院君)으로 봉작(封爵)되신데 연유(緣由)하는 것이다.
 
  숭선공을 시조로 모시는 해풍김시 후손중에 8세 휘 수연(壽延)공계 후손 덕수김씨(德水金氏), 10세 휘 수(守)공계 후손은 정주김씨(貞州金氏)라 칭하고 있다. 이는 고려 공민왕23년(1374) 친원파인 이인임(李仁任) 일파가 10세의 우(禑)을 왕위에 올려 놓고 북원의 연호인 선광(宣光)을 쓰면서부터 친명파인 우리 해풍김씨는 정란(政亂)을 피하여 고향을 떠나 흩어져 살게 되고 종친간에 연락이 두절된 상태로 몇백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후대에 와서 해풍군의 별호인 정주, 덕수를 따서 관향위주(貫鄕爲主)로 본관을 정하게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다 정조15년(1791)17세 휘 광악(光岳)공께서 제1차보인 신해보(辛亥譜)를 편찬하실 때 본관을 달리하고 있으나 시조는 해풍부원군 숭선공이시니 동원종문(同源宗門)임이 확인되었고 서기 1865년 제3차보인 을축보(乙丑譜)수찬시에는 풍덕수운 휘 평(枰)공계, 남양쌍부 휘 장(樟)공계, 덕수(구 야교) 휘 수연(壽延)공계, 정주(구 돈암) 휘 수(守)공계, 황간금산 휘 효신(孝信)공계, 평양 휘 체경(逮慶)공계, 안변 휘 재(載)공계등 전국 각파에서 수단에 참가하여 해풍김씨세보에 등재되었으며, 서기 1983년 해풍김시대종회에서는 해풍김씨, 덕수김씨, 정주김씨 대표가 모여 본관을 달리 호칭하고 있으나 휘 숭선공을 시조로 모시는 동조동근(同祖同根)임을 재확인하고 제3차보명을 해풍(덕수,정주)김씨세보로 하여 합보(合譜)를 간행하게 되었으니 김숭선(金崇善)공 후손들은 해풍김씨대종회(海豐金氏大宗會)를 중심으로 하여 대동단결(大同團結)하여야 한다.
 
                                                      1화선 화서역에서   20250301
 
 
  해풍김씨 종원들은 경향 각지에 분포하여 거주하고 있으며, 파명은 중시조의 거주지명을 택하여 호칭하게 되었다.
 
  해풍김씨 세계분파는 6세(世)에서 이(泥)공은 풍덕수운파(豐德水雲派), 휘 항(沆)공은 정주파(貞州派), 휘 체경(逮慶)공은 평양파(平壤派), 휘 재(載)공은 안변파(安邊派)가 되시고, 7세(世)에 와서 풍덕수운파에서 남양쌍부파(南陽雙阜派)와 덕수파(德水派)가 분파되고, 정주파에서 황간금산파(黃澗金山派)가 분파되었다. 그후 8세(世)에서 14세(世)까지 몇분 선조님께서 거주지를 이동하여 집성촌을 이루고 살게 되시면서 현재는 20개파로 되어 있다.
 
  선대(先代) 조상님의 거주지 분포를 살펴보면 풍덕수운파, 산귀파, 이호파, 유현파, 관곡파, 덕수파는 경기도 개풍군, 장단군에서 세거하시고, 정주파는 경기도 장단군, 개풍군, 황해도 신계등지에서 세거하시고, 일부는 제주도에서도 세거하시고 있다. 그리고 서울을 비롯하여 강원도 화천, 춘천, 황해도 사리원, 충북 황간, 대구시, 전북 부안 고창, 광주시, 경기도 포천, 강화, 부산시, 진주, 평양, 안변 등지에서 세거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종원의 인구분포현황은 1986년도 경제기획원 통계국 발표에 의하면 해풍김씨 전체는 15,025명이고, 본관별로는 해풍 8,141명, 덕수 4,385명, 정주 2,499명이다.
 
   285개 김씨중에서 해풍김씨는 인구수에 의하면 35번째의 성씨이다.
 
자료: 대종회보 제 23호 3쪽
 

 

제45차해풍김씨 대종회 정기총회 기념한 대종회장님님 고문님,이사님들 2025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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