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시 해미면 휴암리에 서산 해미 유적지가 있다고 지도에 표시되어 있어 이곳을 찾게 되었는데 유적지
형체는 알수없고 빈터 산비탈 길로로 티엠은 안내하고 있다 그리고 이곳은 역사적인 선사유적지로
여러 차례발굴을 해서 고증하고 배가 사전에도 등제되어 있는데 이곳 관할 서산시는 이곳에
선사유적지라는 표시나 표적없이 방치되고 있었다
결국 티멤이 그친 그 장소가 서산 휴암리 선사유적지일 것이라는 티엠 종료 지점을 잠시 응시하고 있는데
큰 소나무밑에 누군가가 갖다놓은 조화와 이곳이 수목장을 해 놓은 것이라는 것 밖에는 주의에는 이렇다 할
흔적이 없어 매우 안타까웠다
일전에 서산 운산면 태봉리에 명종대왕 태실 및 비 보수공사에서 방치되어 있는 것보다 이곳 서산 휴암리
선사유적에서 현장을 확인한 나로서는 너무 이곳 관리가 한심하다는 결론에 이르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조금 유명한 해미읍성은 이곳 선사시대 이후에 즉 조선시대의 것이지만 이곳에 최초로 정착하여
선사유적을 이루었던 흔적은 역사고증 백과사전 자료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나는 이곳을 방문하여 보며 이곳이 비록 지금은 사유재산으로 관리하고 있지만 서산시가 적극 나서서 선사시대
유물발굴 터와 그 주변에 선사유적 푯말이라도 설치하여 이곳을 찾는 이들이 오늘 내가 방문하여 허무하게
돌아가게 하지는 말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곳 서산 휴암리 선사유적지에 관하여 궁금한 게 많아서 인터넷 백과사전에 찾아보니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서산 휴암리 선사 유적지
요약 서산휴암리선사유적지는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휴암리와 고북면 용암리 일대에 있는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유적이다. 1968년부터 1970년까지 4차에 걸쳐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해 조사가 진행되었으며, 그 결과 신석기시대의 돌깐 시설 1기와 청동기시대의 집터 11기, 야외 불뗀자리 1기가 확인되었다. 신석기시대의 돌깐 시설은 산 정상부에 있는 제의 관련 유구로 주목되며, 청동기시대의 집터들은 송국리 문화의 발생과 전파 과정을 설명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발굴경위 및 결과
서산휴암리선사유적지(瑞山休巖里先史遺蹟址)는 1968년 5월 31일부터 6월 10일, 같은 해 10월 10일부터 18일, 1969년 5월 8일부터 19일, 1970년 9월 7일부터 15일까지 총 4차에 걸쳐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하여 조사되었다. 유적의 존재는 해당 토지의 소유주가 밭에서 수습한 석기와 토기를 박물관에 신고함으로써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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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은 해발 50~76m의 언덕에 자리하며, 전체 면적은 2,010㎡이다. 1 지점과 2지점으로 나누어 조사가 진행되었는데, 1지점에서는 신석기시대 돌깐 시설과 청동기시대 집터 2기, 2지점에서는 청동기시대 집터 9기와 야외 불뗀자리 1기가 확인되었다. 1지점과 2지점은 행정구역상 구분되어 각각 충청남도의 해미면과 고북면에 자리하지만, 지형상 동일한 언덕 위에 있으며 약 400m 떨어져 있다.
형태와 특징
신석기시대의 돌깐 시설은 해발 76m의 언덕 정상부 부근에 자리한다. 표면을 노출하는 선에서 조사가 마무리되어 정확한 구조를 파악할 수 없지만, 약 16 ×20m의 범위에 20~40㎝ 크기의 할석을 깐 것으로 추정된다. 보고자는 언덕 정상부에 자리한 점, 집터로 보기에는 규모가 크고 내부에서 불 땐 자리가 발견되지 않은 점 등을 근거로 무덤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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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달리 높은 지역에 있는 ‘산상유적(山上遺蹟)’에 포함하여 해안지역 거주민의 어로 및 해양 활동과 관련된 제의 장소로 파악한 견해도 있다.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의 문양을 볼 때 신석기시대의 비교적 이른 시기에 해당할 가능성이 있지만, 출토 맥락이 분명하지 않아 정확한 연대 추정은 어렵다. 이 밖에 둥근옥, 숫돌, 돌도끼 등의 유물도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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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의 집터는 평면 네모꼴 8기, 둥근 꼴 3기로, 중복 축조된 3호 · 4호 · 5호의 선후 관계를 통하여 네모꼴에서 둥근꼴의 변화가 상정된다. 면적은 네모꼴이 10~29㎡, 둥근꼴이 18~23㎡로 큰 차이가 없다. 대부분의 집터는 내부 중앙에서 긴 둥근 꼴 구덩이가 조사되었으며, 구덩이의 내부 양 끝에 2개의 기둥구멍이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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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와 3호에서는 긴둥근꼴 구덩이의 주변으로 사각형을 이루는 4개의 기둥구멍이 배치되는데, 이들은 모두 평면 둥근꼴 집터에 해당한다. 6호 집터의 바닥면에서는 점토로 다짐한 흔적이 관찰되기도 하였다. 9호 집터만 유일하게 내부에서 긴둥근꼴 구덩이가 확인되지 않고 다수의 기둥구멍만 발견되었다. 11기의 집터 모두에서 출입 관련 시설이나 불 땐 자리는 확인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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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은 골아가리구멍무늬토기, 골아가리토기, 붉은 간토기, 간돌검, 간돌화살촉, 삼각모양돌칼, 조갯날도끼, 대팻날도끼, 숫돌, 가락바퀴 등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유물들과 네모꼴이 주를 이루는 집터의 평면 형태 등을 볼 때 청동기시대 늦은 시기인 송국리 문화 단계 중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유적으로 판단된다. 절대연대(絕對年代) 측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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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 가기전 들판에 있는 상징물 20250219
야외 불 땐 자리로 보고된 유구는 도면이나 사진이 제시되지 않아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보고서에는 8호 집터의 북서쪽, 7호 집터의 북동쪽 2m 지점에 자리한다는 사실과 지름 1m, 두께 35㎝ 정도의 불탄 층이 형성된 상태라는 내용만 언급되어 있다. 유구 내부에서 다수의 토기 조각이 출토되었으며, 동일한 문화 유형의 취락에서 일반적으로 야외 불 땐 자리가 잘 관찰되지 않는 점을 생각하면 토기 가마터일 가능성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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