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홍성읍성,홍성군청,홍성여고 를 가다 20250214

한마음주인공 2025. 2. 17. 15:59

 

홍성읍성 또는 홍주성이라고 하는 홍성읍성을 언젠가는 꼭 가보고 싶었다  그런 꿈을 드디어 실현하여 홍성읍성을 

관람하게 되었다 홍화문을 중심으로 홍성읍성의 규모가 예전 건물들의 흔적을 복원해 놓은 홍주 역사박물관에서

알게 되며 당시 홍주읍성의 규모가 지금은 반으로 잘려 홍성군청이 홍성읍성 안에 존재하지만 그 이전에는 

더 북쪽으로 홍주읍성이 규모를 가름할 수 있었다

 

홍주 홍화문 에서 20250214

 

 

그리고 역사관에서 알수 있는 일인데 홍주읍성 일원에서 3.1 독립운동이  있었고  홍주읍성은 조선 초기기에 돌로 쌓은 읍성으로,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에 있다. 조선 초 기존에 있던 성을 그대로 사용한 평지형 읍성으로 북쪽보다 남쪽이 높은 지형을 잘 이용하여 백월산에서부터 흐르는 하천을 자연 해자로 삼고, 읍성으로의 주 출입은 동문을 통하도록 하여 도로와 읍성 안 공간을 구획하였다. 전체적으로 읍성은 북향 한 형식을 취하되 객사를 포함한 주요 공해 건물은 남향하도록 하여 풍수와 기능을 동시에 해결한 독특한 구성을 하고 있다.

 

홍화문 성곽길에서 20250214

 

 

홍주산성 내부 20250214

 

 

이처럼 홍주읍성을 들어가 성곽길을 남에서 서로 걸어보며 당시 휘날리던 붉은색의 영기를 지금도 복원하여 이지역의 

행정중심이 홍주읍성입을 알게 한다  역사관에서 배운대로 남쪽이 높은 지형을 이용하여 북으로 갈수록 낮은 지형을

이용하여 동서남북의 출입문을 만들어 성안에서 행정의 중심이 이루어졌음을 알게 된다

 

홍주산성 내부 20250214

 

 

몇 달 전 홍성군  갈산리에 있는 김좌진 장군 생가집과 전시관을 둘렀을 때 여성 문화 해설가님이 이곳 홍성의 홍주성은 조선초기에는 충남에 있는 여러 성가 운 데에서도 규모가 단연 으뜸이었는데 홍주성만 아니 홍주성만이 현재 독립적인 홍성시가 되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었다 

 

홍성군청 이 홍주 읍성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20250214

 

 

 

아마도 군 단위에서 시단위로 넘어가는 데는 인구수가 좌우하는데 아직 홍성읍 주변은 인구가 미달이어서 정식적인 시가

되지를 못하고 있다 한다 홍주산성을 들러보며 남쪽의 홍화문 위에서 홍주읍을 돌아보며 이곳이 예전에는 행정과 교통의

팔달로 역할을 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홍주읍성과 인접한 홍성군청을 들어서니 커다란 아름 더리 고목느티나무 2 구루가  이곳 홍주읍성의 역사를 말해주는 듯하고 현재 홍주군청은 자체독립건물로 자리가 협소하여 긴급옆에 다른 군청 관련 사무실이 들어서 있다 아무 도 문화재관련하여 읍성 안에 설립이 안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홍주읍성 홍화문 상부 누각에서 20250214

 

 

 

그러나 홍주군청에서 덕산방향 쪽 북으로 5KM 지점에 충남도청이 있어 그래도 홍성군의 도시화는 예정대로 잘 진행되어

조만간 홍성군에서 홍성시로 승격할 것 가았다  이처럼 홍주읍성 주변에는 홍성역 홍성여고등이 있어 그지방을 간 김에

두로 돌아보았다 홍성역은 장항선이 지나는 지라 아마도 자동차가 없던 시절 기차 편으로 더 가까이했지 않았나 한다

 

홍주읍성 역사관내에서 20250214

 

 

이곳 홍주읍성을 여행하면서 홍주읍성과 홍성에 대하여 더 알고파 인터넷 배가 사전에 들어가 살펴보니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 홍주읍성 

현재 남아 있는 홍성 홍주읍성의 성벽 둘레는 약 810m 정도이고, 성안에는 동문인 조양문(朝陽門)과 외삼문(外三門)인 홍주아문(洪州衙門), 동헌(東軒)인 안회당(安懷堂), 여하정(余何亭) 4동의 건물이 현존한다. 처음 읍성이 축조된 연대는 확실하지 않지만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둘레가 533보 2척이고, 여름과 겨울에도 마르지 않는 샘이 하나 있다고 하였다.

 

 

 

조선 초 문종 때 충청 전라 경상도 체찰사(體察使)였던 정분(鄭苯)은 각 지역의 읍성을 구별하여 일부는 그대로 사용하고, 일부는 새로운 규식(規式)대로 고쳐 쌓거나 혹은 물려 쌓아 규모를 확대하는 등의 차이를 두기를 청하였다. 그중 홍성 홍주읍성은 충청도의 비인, 남포, 보령, 해미, 당진, 면천 읍성과 더불어 그대로 사용하도록 한 읍성의 하나였다.

 

 

당시 실록의 기록에는 둘레 4,856척, 높이 11척, 여장(女墻) 높이 2척, 적대(敵臺) 24곳 중 18개소는 아직 쌓지 않았고, 성문 4곳 중 1곳에는 옹성(甕城)을 두지 않았다고 하였다. 또한 성 안에 우물 2곳이 있고, 성 안에는 작은 천(川)이 흐르고, 해자(垓子)는 아직 파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후 임진왜란 이전까지 홍주성의 규모는 대체로 큰 변화가 없었는데, 성종 때 편찬된 『신 증동국여지승람』에 둘레 4,915척 높이 15척이라 하고 세 개의 우물이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높이를 약간 높이는 정도의 수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홍주읍성 역사관을 나오면서 20250214

 

 

홍주읍성 주차장에서 본 홍주읍성 20250214

 

 

그 뒤로 영조 때의 기록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성의 둘레와 높이가 각각 주척으로 5,850척, 16척이라 하고, 3칸 규모의 동문과 서문 외에 누각이 없는 북문을 언급하면서 남문이 없다고 한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 이후 둘레를 조금 넓히되 남문은 폐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와 더불어 성가퀴(堞) 386개소와 7개의 곡성(曲城)이 설치되었고, 읍성 내 경사당(景士堂)의 서쪽으로 길이 15척, 너비 10척의 연못이 조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홍성군청 20250214

 

 

 

홍주읍성 역사관을 나와 홍주군청으로 가는 도중에 본 홍성군청 20250214

 

 

19세기 들어 홍성 홍주읍성은 몇 차례 부분적인 수리가 있었으며, 가장 큰 변화는 1867년 홍주 목사로 부임한 한응필(韓應弼)에 의하여 진행되었다. 1870년 2월부터 10월까지 진행된 공사에는 한응필이 연봉금 3천 냥과 결세부가금 3만 5천 냥 등 총 6만 3천 냥을 투입하여 성벽 567척을 새로 쌓고 615개의 성가퀴(堞)를 설치하는 외에 동문인 조양문(朝陽門), 서문인 경의문(景義門), 북문인 방화문(望華門)과 문루를 신축하였다. 당시 공사는 이와 같이 읍성을 수축하는 외에도 객사 42칸을 보수하고, 관아 224칸을 신축하는 등의 대규모 정비 사업이었다.

 

홍주읍성 역사관내에서 본 홍주의병 자료 20250214

 

 

1907년 내각령 1호가 발효된 이후 일제강점기에 들어 읍성 안을 흐르는 천(川)의 북쪽으로 동문과 서문 및 북문을 연결하는 도로를 직선화하고 그 폭을 넓히기 시작하였고, 성 내외를 연결하는 도로가 신설되기 시작하면서 읍성의 북쪽 지역 성벽이 철거되고 해체되기 시작하였다. 지목과 지번이 부여되지 않았던 성벽이 토지대장에 기록되면서 일본인들이 소유하였던 성벽을 중심으로 직교형 가로망으로의 변화를 수용하기 위해 성벽을 철거하게 되고, 이로써 읍성의 물리적 공간을 한정하였던 북쪽의 성벽이 점차 사라지고 성벽 밖으로부터 안으로 도시화가 진행되었다.

 

 

홍주읍성 홍화문 누각 20250214

 

 

1972년에 홍성 홍주읍성이 사적으로 지정되면서부터 본격적인 보수 정비가 시작되었다. 1975년에 동문인 조양문을 완전 해체 · 보수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고, 2006년부터 시작한 학술 조사 및 발굴 조사를 통하여 성벽의 훼철 구간과 규모를 확인한 후, 이를 토대로 2013년 남문인 홍화문과 문루를 복원하였다. 또한 2008년 북문지 발굴 조사와 2015년 수구지 발굴 조사를 토대로 성벽을 정비함과 동시에 2020년에 옹성을 갖춘 북문을 복원함으로써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홍주읍성 산성 성곽길에서 20250214

 

 

 

홍주군청앞 홍성한우 먹거리 촌 20250214

 

 

 

 

홍성 홍주읍성의 전체적인 형태는 남북 방향이 길고 동서의 폭이 좁은 형태로 남북의 경우 북쪽이 넓고 남쪽으로 가면서 점차 좁아져 남문 쪽에 이르면 회절점이 형성되어 쐐기와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풍수적으로는 행주형(行舟形)으로 분류된다. 읍의 서쪽 백월산으로 흘러내리는 두 갈래 물길인 월계천과 홍성천이 읍 전체를 감싸 돌며 합쳐져 동쪽으로 흘러 자연 해자를 이루고, 읍성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들 하천을 연결하는 소하천이 성을 가로지르며 금천(禁川)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읍성 내 도로는 일반적인 조선시대 읍성의 도로가 ‘T’ 자 모양으로 되어 있는 것에 반하여 홍주성은 ‘ㅗ’ 자 모양으로 되어 있다.

 

 

공공건물인 객사가 읍성의 북쪽 중앙에 위치하고 남쪽 아래로 두 개의 동헌이 동서로 배치되었다. 서쪽에는 군수가 행정을 집행하던 안회당(安懷堂)을 포함한 동헌이, 동쪽에는 군사 목적의 진영(鎭營) 동헌이 배치되어 균형을 이루었다.

현재 발굴 조사를 토대로 읍성의 둘레와 높이를 실측한 결과는 각각 1,528m, 4.5m 정도로 조선 전기 및 임진왜란 이후의 기록에 비하여 그 규모가 큰 편인데, 이는 19세기말 대대적인 수축을 통하여 읍성의 규모가 확대된 결과로 볼 수 있다.

 

 

성벽을 쌓은 방법은 쌓은 시기와 구간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대체로 성벽 밑에서 위로 갈수록 점점 작은 돌을 사용하되 장방형으로 돌을 가공하여 통줄눈이 생기지 않도록 하였으며, 85° 정도 안으로 기울여 쌓았다. 성벽 내부는 규격이 같은 돌로 뒤채움을 하여 흙이 유입되어 토압이 증가하지 않도록 하였다. 또한 성벽 몸체 위에는 여장(女墻)을 설치하였고, 읍성의 성벽을 따라 치(雉)를 설치하여 벽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고 방어에 유리하도록 하였다.

홍성 홍주읍성은 처음 축조된 시기를 알 수는 없지만 기록을 통해서 조선 초기에 이미 잔존하고 있던 성으로, 기존에 구축되었던 그대로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평지에 위치한 읍성으로 북쪽보다 남쪽이 높은 지형을 잘 이용하여 백월산에서부터 흐르는 하천을 자연 해자로 삼고, 읍성으로의 주 출입은 동문을 통하도록 하여 도로와 읍성 안 공간을 구획하였다.

 

 

읍성의 전체적인 공간 구성은 다른 읍성과 달리 남쪽을 비우고 북쪽에 민가를 배치하였지만 객사를 포함한 주요 공해(公廨) 건물은 남향하도록 하여 풍수와 기능을 동시에 해결한 독특한 구성을 하고 있다. 그밖에 시간의 켜에 따라 다양한 석축 쌓기 방식이 혼재되어 있는 것도 홍주읍성의 가치를 높이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2. 홍성여고

1946년 홍성여자중학교로 설립되었으며, 1953년 학제 변경에 따라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분리·개편되었다. 분리 당시 교사를 마련하지 못해 중학교와 같은 교사에서 수업을 하였고, 1975년 충청남도 홍성읍 소향리로 이전하였고 2018년 5월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대교리로 이전 개교하였다.

 

홍성여고 예전건물 20250214

 

 

교육목표는 “합리적인 사고의 배양으로 주체적인 인간을 기른다. 잠재력 개발교육으로 실력 있는 인간을 기른다. 예절 중심의 인성교육 강화로 덕성 있는 인간을 기른다. 자기 주도적 학습력 신장으로 창의적인 인간을 기른다. 심신을 수련하여 조화롭고 건강한 인간을 기른다.”이다.

 

홍성여고 체험관 20250214

 

 

 

홍성여고내 북쪽에서 20250214

 

 

교과별 전용교실 구축, 활용을 통한 교육력 제고, 농산어촌 우수 고등학교 연구학교 운영, 학습자 중심의 심화 보충학습, 방과 후 학교 운영 등을 특색사업으로 하고 있다.

이 밖에 영재학생을 위한 수월성 교육 심화 프로그램, 독서 활성화 프로그램, 기본 학력 증진 프로그램 등을 운영하고 있다.

홍성여고 건물 20250214

 

 

큰도로에서 약간 언덕길을 오르며 홍성여고 학교 2025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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