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궁은 여러 번 다녀왔어도 다시 경복궁을 찾는 것은 방문할 때마다 이곳이 예전 왕이 집무실과
근정전의 거대한 건축물을 보기 위함이었다 예전에는 자주 못갔지만 2~3년 사이에 꽤 여러 번 이곳을
방문하게 된다 갈대마다 역사문화 해설사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 더욱더 우리 역사에 친근하게 된다
이번 방문에는 근정전 바로 뒷편에있는 왕의 집무실인 편전인데 이곳 가운데 중심 편전이 있었는데
이곳은 주로 여름철 처럼 날씨가 무더운 곳에 문을 열어놓고 집무를 수행했다고 하는 곳이고 중심 편전을
중심으로 도편전과 서편전이 있어 이곳에는 추의가 있을을때 동서편전을 사용하고 이곳 편전 건물에는
난방 바닥이 설치되어 굴떡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봐도 편전 건물에 밀착 설치돤 굴뚝이 없다
이어 해설사가 해설을 하며 굴뚝이 바로 뒤 요사체에 땅밑으로 연결하여 4개의 굴뚝집으로 연기가
나간다는 4개의 굴뚝집이 얻쳐있다 그리고 굴뚝 앞면에는 만수무강과 천세만세라는 이라는 톡특한
문자가 벽돌로 하여 새겨져 있었다 이반에 와서 이런 사실을 처음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편전뒤에 왕비 처소에 대하여 문화해설사의 해설을 들으니 왕의 처로 발탁되면 한평생을 살아도
이곳 왕궁을 벗어날수 없다고 한다 심지어 자기 부모가 돌아가셔도 자기 고향집에 갈 수가 없다
하니 왕빋들의 애환을 조금이라도 이해가 되고 그래서 집뒤에 테마파크를 조성해 놓아 그곳에서
자연을 줄기며 애환을 달랬다 하니 왕비란 직책이 그리 호락하지 않은 직책임을 알게 한다
이어 향원정에 이르러 향원정에 당시 고종과 소헌왕후인 명성왕후가 연못 가운데 향원정에서 차를
줄기며 담소했고 당시 이곳에서 겨울 차를 줄기며 소련에서 온 피켜스켜 들이 대회가 있었다 하니
조선후기의 생활과 사회적 현상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곳 향원정이 전력발전소가 처음 생겨 에디슨이
처음 발명한 꼬마전구가 아시아 쪽에선 처음 우리나라에 수출되어 전기불을 향원정에서 밝히게 되었다 한다
그리고 다시 명성황후가 살았던 궁으로 들어가 명성황후가 일본인 자격에 의해 살해되어진 장소에 와서 일본인
자객이 경복궁으로 침입해 명성왕후가 거처하는 곳까지 온 것이 단 25분뿐이 안 걸렸고 이곳 문을 지키던 우상손이 일본인에게 매수되어 문을 열어 주었다 한다 일단 자객들은 명성황후를 확인한 후 칼로 명성황후를 저격하고 인근 옆산에서
불태워져 뼈만 남았다 한다
일본인이 너무 무서워 당시 고종은 바로 건물 옆에서 있었는데 살해사 울움소리가 나와도 문밖으로 나와보지 못하고 ㄷ고조아들은 상투를 잡힌채 끌려 다녀야 했다고 한다 이 얼마나 치욕적인 사건인가 그러니 일인에 대한 반한 감정을
이루 말할수가 없다 한다
그리고 명성황후 저격 범들에게 문을 여어준 우상순은 한국에서 저격 피해가 우려도 처와 자식을 남겨두고 일본으로 가 다시 일본여자와 결혼하고 나은이가 우리가 아는 씨 없는 수박으로 알려진 우장춘 박사라 하니 이 얼마나 애틋한 사연인가
우장춘 박사는 자기 아버지가 한국에서 명성황후를 시해하려할때 조력 자였던 것을 알고 참회하는 마음으로 일본에서 한국으로 귀하해 일본에서의 하려 한 박사나 농업 시험관 직책을 무사하고 한국에서 이 결과를 발표해 유력하고 유명해졌다고 하는데 이때 박정희 대통령이 우장춘 박사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한다
이첨럼 경북궁은 오면 올수록 많은 것을 알게 되고 전혀 예상 목한것을 알게 되니 자주 찾게 되고 또다시 오게 될 것 같다
이 글을 쓰면서 경복궁 근정전에 대하여 궁금하여 인터넷 백과사전에 찾아보니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경복궁 근정전
1985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정면 5칸, 측면 5칸의 팔작지붕 중층건물.
공포(栱包)는 다포계(多包系)이고, 구조는 전후 툇간 11량(前後退間十一樑) 구조이다.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거나 정령(政令)을 반포하는 정전(正殿)으로, 때로는 사신을 맞아들이기도 하고 양로연(養老宴)이나 위로연을 베풀기도 하던 곳이다.
현재의 건물은 1867년 중건된 것으로, 경복궁 창건 당시인 1395년(태조 4)에 지은 건물이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 270여 년 만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중건 당시 태조 때의 건물을 원래대로 복구하지 않고 회랑(廻廊)을 단랑(單廊)에서 복랑(複廊)으로 바꾸고 월대(月臺: 궁전 앞에 있는 섬돌)도 새로 만드는 등 변화가 있었다.
현재의 근정전은, 경복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2000년부터 진행되어 온 보수공사의 결과이다. 근정전의 보수는 건물을 지탱해 주는 고주(高柱, 높은기둥) 4개의 맞춤 부분이 벌어지고 용마루와 처마가 처지는 등의 문제점이 발견되어 1층의 연목과 2층에 해당하는 부분을 완전히 해체하여 재조립한 대규모 공사로, 2000년 1월부터 2003년 10월까지 46개월에 걸쳐 약 72억 원의 사업비를 투입하여 완료하였다.
기단부는 월대라 하며 이중으로 되어 있는데, 아래위층 월대 주위에는 긴 댓돌을 돌리고, 그 위에 하엽동자(荷葉童子)와 팔각 돌란대 [廻欄石]로 구성된 석 난간(石欄干)을 세웠다. 각 난간의 엄지기둥에는 12 지상(十二支像)을 방위에 맞게 조각하여 정전을 상징적으로 수호하게 하였다.
계단은 앞뒷면에 각 1개, 좌우 측면에 각 2개씩을 두었다. 앞쪽 중앙계단에는 답도(踏道)를 마련하여 구름 속에 노니는 봉황을 새겼고 건물 내부의 바닥에는 전돌을 깔았다. 또, 내부의 가구(架構) 구성을 보면 바깥두리기둥[外陣柱]과 안두리기둥[內陣柱]을 기본으로 하고 여기에 다른 건물에서는 보기 힘든 귀고주[隅高柱]를 두었다.
뒷면 중앙칸 안두리기둥 사이에 보좌(寶座)를 마련하고 그 위에 어좌를 설치하였다. 어좌 뒤에는 일월오악병풍(日月五岳屛風)을 배경으로 삼아 사룡수(四龍首)를 조각한 삼절병(三折屛)을 두었다.
어좌의 상부에는 사각평면에 다출목(多出目)의 작은 공포를 짜고 네 귀를 모접이 한 뒤 다시 다출목의 작은 공포를 짜서 이른바 말각천장(抹角天障) 형식의 보개(寶蓋)를 마련하였다. 그 중앙에는 쌍룡과 여의보주를 조각하였다.
보좌는 복련(覆蓮)과 앙련(仰蓮)을 새긴 연화대좌를 받침으로 하되 대좌의 옆면은 3단의 궁판으로 나누었다. 조롱동자처럼 조각한 동자를 사용해서 궁판을 구획하고 여기에 풍혈(風穴)을 새기고 그 사이에 보상화문(寶相華文)을 조각하였다.
대좌 위에는 난간을 두었는데, 계자각(鷄子脚: 난간에 세운 가느스름한 기둥) 사이 아랫부분에는 귀면(鬼面)을 2구씩 두고 그 상부에는 풍혈을 조각하였으며, 계자각 윗부분은 하엽(荷葉: 연잎)과 원죽(圓竹: 원형의 돌란대)으로 둘렀다. 한편 보계(補階)는 앞쪽과 좌우 측면마다 1개씩 설치하였다.
기둥은 모두 원기둥이며 둥글게 다듬은 주춧돌 위에 세웠는데 바깥두리기둥은 시각적인 교정, 즉 양쪽 끝의 창방(昌枋)·평방(平枋)이 처져 보이는 것을 막기 위하여 귀 솟음 수법으로 처리하였다. 기둥 사이에 솟을 빗살을 한 분합문을 달고 문인방과 창방 사이에 교창(交窓, 光窓)을 설치하였다.
공포대(栱包帶)의 구성은 외삼출목(外三出目)·내 사출목(內四出目)으로 기둥머리마다 직각방향으로 튀어나온 안초공(安草工)을 두었다. 기둥머리 부분인 창방과 평방 위치에 외부 살미[山彌]는 옆으로 약간 뻗어 휘어 올라 간 3겹의 앙서[仰舌]와 그 위에 익공형식(翼工形式)으로 된 살미로 구성되어 있다. 외부살미에 새들이 깃들이지 못하도록 전체를 부시(罘罳: 새가 앉지 못하도록 전각 처마에 둘러치는 철망)로 덮었으며 2층 바깥쪽에도 똑같이 설치하였다.
공포는 아홉 겹으로 겹친 운궁(雲宮: 살미 내부의 중첩된 부분)으로 처리하였다. 건물 안쪽에서 볼 때 위층은 아래층 퇴보[退樑]와 내 목도리(內目道里) 및 멍에창방을 짜 맞춘 곳 위에 위층 평주를 놓고 아래층과 똑같은 공포로 짜 올렸다.
내부 고주(高柱)는 중간 부분을 바깥두리기둥에서 퇴보로 연결하였고 이 퇴보와 뜬창방 사이의 상부 둘레에는 당초문을 조각한 낙양을 둘렀으며 이 뜬창방 위로는 머름을 두고 운궁으로 치장하였다. 내진고주(內陣高柱)의 상부는 다시 창방·안초공 및 주두(柱頭: 대접받침)를 두었다
.
이 위에 우물천장[格字天障]을 가설했는데, 천장 중심부에는 장방형 틀을 돌리고 다출목의 작은 포작을 다포식으로 틀어 올려 천 개를 마련하고 구름무늬 사이에 쌍룡과 여의보주를 조각하였다.
팔작지붕의 내림마루와 추녀마루·용마루에는 모두 회반죽을 발랐는데, 용마루 양끝에는 취두(鷲頭: 매 머리모양의 장식)를, 추녀마루 위에는 용두(龍頭)와 잡상(雜像)을 배열하였고 사래 끝에는 토수(吐首: 龍頭·鬼頭 모양의 장식)를 끼웠다.
건물의 외부 정면 좌우에는 청동제 향로를 놓았으며 정면 서쪽계단 옆에는 무쇠로 만든 드므(넓적하게 생긴 독)를 두었다. 드므에 물을 담아두어 이 물에 화기(火氣)의 얼굴이 비치면 놀라 숨거나 움츠리어 화기가 진압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또한, 근정전에서 근정문에 이르는 어도(御道) 좌우에는 정1품부터 정 9품까지의 품계를 새긴 품계석(品階石)을 배열하였으며 차일(遮日)을 칠 때 사용하였던 차일고리가 앞마당에 남아 있다.
조선 중기 이후 차츰 기술적 세련미를 잃어가던 수법을 가다듬어 완성시켰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으며, 아울러 조선의 가장 큰 궁궐의 정전이라는 점에도 의미가 있다. 그러나 양식과 수법·의장 등과 단청의 색조·무늬 등을 모두 앞서 지어진 인정전(仁政殿) 양식을 본떴으나 충분히 소화시키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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