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정조지

한마음주인공 2021. 1. 29. 12:31

어제저녁 1/28일 방영된 kbs 한국인 밥상 10주년 특집 4편에 방영된 정 조지에 대하여 조선시대 우리 음식을 연구한 

서유구란 인물을 처음 알게 되고 흥미있게 조선시대 음식을 재현하여 음식의 맛을 보는 아주 특별한 기행의 영상을

보게 되었구 정 조지에 대한 첫 대면을 하게 되었

 

 

한마디로 이런 음식이 조선시대 학자이자 선비인 분이 음식을 만들고 음식을 소개한 것에 큰 충격을 받게 된다 당시

시대에선 참 어려운 일인 이일을 해내에 책을 저술하고 널리 백성이 이용하도록 하였다는 것이 보는 순간부터 흥미 돕고 아주 특이한 것이라서 내내 눈을 돌릴 수가 없어 그 자료를 정리에 글로 남기고 싶었다

 

 

그동안 한국인의 밥상을 통하여 우리나라 전국 각지를 돌며 우리 음식의 옛 향기를 찿아가는 프로그램이어서 줄 거야

찾는 프로이었는다 정조 지를 알면서 우리나라 조선시대 유학자가 이러한 음식 연구를 하여 기록해 놓았던 것이 정말 놀랍고 자랑스러운 일이 아닌가 한다

 

 

이 음식을 연구한 조선 후기 실학자 풍석 서유구가 쓴 113권의 방대한 실용 백과사전 "임원경제지의" 중 일곱 권의 ""정조 지다""다  솥정에 도마 조 솥과 도마라는 일상적 조리도구를 이름으로 내서운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정조 지는 음식배과 사전이다 

 

 

정조 지를 쓴 서유구는 조선의 정약용과 함께 18,19세기 말 실학 계열의 농업 개혁론을 대표하는 학자이다 서유구 저서 활동은 다방면에 걸쳐지만 특히 농학에 기여한 바가 크다 실학자로서의 경험과 이론을 바탕으로 조선 후기 최대 농서인 "임원경제지"를 저술했고 1790년에는 중광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와 같이 서유구는 대표적인 사대부였고 그의 조부 서명응은 정조의 스승이었고 서유구 자신 또한 승정원 규정각, 사헌부에서 일을 하였고 형조, 에조, 호조, 병조 판서를 두루 거쳤으며 순창군수와 수원유수 , 전라관찰사를 지낸 인물이다 그는 직접 농사를 짓고 강에서 고기를 잡으며 부엌에서 음식을 직접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서유구는 관직에서 물러나 18년간 긴 세월 동안 바로 서유구란 책을 쓰게 되었는데 관직의 선비가 직접 음식을 만들었다는 것이 시대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좀 특이한 선비였던 것 갔다 후대 사람들이 따라먹을 수 있는 책을 써서 백성들로 하여금 널리 유익하게 했던 것이다 

 

 

서유구란 책은 한자어로 기술되었던 것을 최근 완성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어제 한국인의 밥상 프로에는 정 조지 요리 복원가 곽미경,곽유경님이 나와 눈내린 추운 겨울에 정조지 음식을 복원해 가는 것을 보고 이들의 노력도 대단함을 보게 되었다 

 

 

조선시대 무관 모자인 전립 투 우묵한 부분에 육수를 끓여 채소를 익히고 챙에는 고기를 구워 먹는다 조선시대에는 

일반인도 이런 도구를 이용해 음식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요리복 원가들이 정 조지에서 나 온음 식중 무염저 음식과 해산물김치 행주 두부 등 우리 현대인이 먹어도 건강하고 유익한 농산물을 복원해 음식을 맛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이 글을 쓰면서 정조 지를 집필한 서유구란 인물에 대하여 좀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 인터넷 백과 사전에 들어가 보니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서유구

정약용과 함께 18, 19세기 실학 계열의 농업 개혁론을 대표하는 학자이다. 본관은 달성. 자는 준평, 호는 풍석. 할아버지는 대제학 명응이며, 아버지는 이조판서 호수이다.

1790년(정조 14) 증광문과에 급제한 이래 외직으로는 군수·의주부윤·전라감사를 거치고, 내직으로는 대교·부제학 등 규장각·성균관·홍문관의 여러 직책과 이조판서·병조판서·우참찬을 거쳐 대제학에 이르렀다.

 

 

그의 학문적 토대는 서명응·서호수로 이어지는 가학과 박지원·이덕무·박제가 등 북학파들의 학문적 경향, 그리고 청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 그의 저술활동은 다방면에 걸쳤지만, 특히 농학에 기여한 바가 컸다. 그가 자신의 농학을 체계화할 필요를 느낀 계기는 35세에 순창군수로 있을 때 내려진, 농서를 구하는 정조의 윤음이었다. 이때 그는 도 단위로 농학자를 한 사람씩 두어 각기 그 지방의 농업기술을 조사·연구하여 보고하게 한 뒤, 그것을 토대로 내각에서 전국적인 농서로 정리·편찬하도록 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는 농업기술과 농지경영을 주로 다룬 〈행 포지 杏浦志〉, 농업경영과 유통경제의 관련에 초점을 둔 〈금화 경독기 金華耕讀記〉, 농업정책에 관련한 〈의상 경계책 擬上經界策〉 등 정력적으로 전개한 기초적 연구를 토대로 아버지의 〈해동 농서 海東農書〉, 할아버지의 〈고사 신서 攷事新書〉 농포 문, 〈증보산림경제〉, 〈과농소초〉, 〈북학의〉, 〈농가 집성〉, 〈색경〉 등 실학파의 여러 농서, 중국의 문헌 등을 참조하여 만년에 조선 후기 최대의 농서인 〈임원경제지 林園經濟志〉를 완성했다.

 

 

그의 농서는 단지 서적만을 통한 연구결과가 아니라 향리 유폐 17년간 고향인 장단의 금화·대호, 서울 주변인 번계·두릉 등지에서 실제 농업에 종사하면서 얻은 경험을 반영한 것이었다. 또한 1834년 전라감사로 있을 때는 구황작물인 고구마를 널리 보급하여 흉년을 당한 농민을 구휼하기 위해 강필리의 〈감저보〉, 김장순(金長淳)의 〈감저 신보〉, 중국·일본의 관계 농서를 참고한 〈종저보〉를 편찬·보급하기도 했다.

 

부세제도 개혁론

서유구는 농민경제의 균산과 균부를 통해 커다란 문제의 하나로 대두된 부세제도를 개혁할 것을 주장했다(→ 삼정). 첫 번째로 결부제 개혁과 양전 법(量田法) 개정의 두 방향에서 전정(田政) 개혁론을 제시했다. 조세를 위주로 한 결부제는 전지(田地) 누탈(漏奪)의 폐를 막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이에 기초한 면적의 계산법과 전품 파악 방식이 불합리하기 때문에 국가가 토지를 파악하기에 매우 어려워 결 총이 날로 감축되고 이서(吏胥) 층의 부정과 부세불균의 폐단이 따른다는 점을 지적하고, 이를 시정하기 위해 결부 법을 전지를 위주로 한 경무법으로 바꿀 것을 주장했다.

 

 

또 결부제 양전은 비척(肥瘠)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토지면적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고 비판하고 이를 방량 법(方量法)과 어린 도 법(魚鱗圖法)으로 개정해 은결(隱結)과 누결을 찾아내어 이서의 농간과 세(稅)의 불균을 막자고 제안했다.

2번째로 군정 개혁방안을 제시했다. 그는 사(士) 계층에게 호포를 부과해 농민의 군역 부담을 덜어주고 전체 농민을 안정시키고자 했다. 그의 호포론은 양반 모두에게 포를 부과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양반에게 포를 부담시킨다는 자체가 이미 봉건적 신분제의 원리에 대한 일정한 수정을 전제로 한 발상이었다.

 

이밖에 상품화폐 유통경제의 주역인 상업종사자를 배려하여 포 부담에서 제외시키는 등 혁신적인 구상도 했다. 3번째로는 환정 개혁론을 주장했다. 환곡은 본래 구휼 정책으로 실시되었으나 이 시기에 이르러 부 세화 되면서 운용의 폐해가 극에 달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그는 지역에 따라 환곡 부담이 불균등해지는 문제를 해소시키려 노력했다. 또한 여기서 그치지 않고 환곡을 둔전에 투자해 지대를 받아 국가재정문제를 해결하는 한편 이를 통해 농민의 농촌 이탈 문제도 동시에 해결하려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토지제도 개혁론

서유구가 목표한 국가재정의 확보, 농민층의 안정화·균산화를 이루기 위한 궁극적 해결책은 토지소유관계를 개혁하고 농업생산력을 증대시키는 데 있었다. 그가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한 토지제도는 3대(三代)의 전제(田制)인 정전 제적(井田制的) 토지제도였다. 그러나 이 제도로 돌아간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 이념에 가까운 한전제(限田制)를 실시할 것을 제안했다.

 

 

그의 한전론은 조선왕조의 체제적 토지제도이며 주자의 토지론인 지주 전호제를 부정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견해였으며, 그가 궁극적으로 시행을 갈망하던 정전 제적·농민적 입장을 반영한 개혁의 방향이었다. 한전론적 이념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지배층인 지주들과의 마찰을 피하고 국가의 입장에서 현실적으로 당시의 농업문제를 해결하고자 제시한 것이 둔전론이다.

 

 

그는 관유 지나, 환곡 및 잡역 관련 비용을 들여 개간 혹은 매득(買得)한 토지에 정부나 지방관이 주체가 되어 경사 둔전(京師屯田)·영 하열읍 둔전(營下列邑屯田)·북방 둔전(北方屯田)·도서 둔전(島嶼屯田) 등을 설치할 것을 주장했다. 이때 생산물의 분배 방식으로는 대부분 병작반수 방식을 택했다. 이는 부세 문제를 지주제를 유지하는 가운데 해결하려는 것이었으나 종전의 지주제 방식과는 다른 것이었다.

 

 

또 그는 심경 법(深耕法)의 채용, 영남의 수전 종도 법(水田種稻法)과 해서(海西)의 견종 법의 보급, 전농관(典農官)의 설치, 집단 협업적 공동경작법의 도입 등을 통해 농업생산력을 증진시켜 부를 축적하고자 했다. 또한 농민층 분해의 결과 토지로부터 이탈된 토지 없는 농민이나 영세 토지소유자들에게 토지를 주거나 임금노동자로 고용하여 이들을 안정화시키려 했다. 결국 그의 둔전론은 지주제를 개혁하지 않는 가운데 생산양식의 질적 전환을 통해 국가재정을 확보하고 몰락 농민의 균산화·안정화를 꾀하는 것이었다.

 

 

그의 경영방식은 자본가적 경영은 아니었으나 전문경영 인제를 도입하고 임노동자를 고용하는 등 선진적인 방식이었다. 그의 토지제도 개혁론은 지주제라는 현실의 토지제도를 혁명적으로 부정하지는 못했으나, 그 전반에 걸쳐 정전적 이념의 구현, 신분제 해체를 의도하면서 경영 형부농 등 새로운 사회계층의 육성을 목표로 제시한 것이었다. 이는 또한 19세기에 비등하게 여론화되는 균 전적 경영론의 단서를 연 것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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