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16일 이후로 이어지는 비없는 날이 오늘8/19도 맑은 날의 연속이다 3일간 이와같은 맑은 날이 앞으로 계속 비없는 날로 이어지기를 기원하면서 그동안 비로 억눌렀던 기억들이 하나둘 풀려나기 시작한다 대신 오늘도 전국적인 폭염이 계속된다고하니 그래도 비없는 날이기에 마음은 한층 가벼워진다
그동안 전국적으로 많은 비가 내려 많은 지역에서 비피해로 농작물이 침수되고나 유실되고 갑작스런 산사태로 마을 전체가 페허가되고 특히 인삼의 고장 금산은 용강댐 방류로 인삼밭이 삽시간에 침수되어 애지중지 기른 인삼이 하루아침에 썩어 문드러져 인삼을 캐려고 6년간 준비한 농민은 망연 자실하는 것을 티비를 통해보았다
이번 장마 폭우는 유레없이 긴 기간 50일정도가 이어 졌다고 하니 산과들은 오직 물로 뒤범벅이 뒨거나 다름없었다 이같은 일은 100년만에 최악의 상황이라고 하니 그동안 우리가 걱정한 지구 온난화 하고도 멀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기상청 에보로는 이같은 상황은 앞으로도 더 많이 격게 될것이라 하니 정말 마음의 준비를 잘 하지 않을 수 없을 것같다
이와같은 긴 장마속에서도 우리 강화도 만큼은 피해가 크지 않은것 같다 먼저 축복밭은 이땅에 살아간다는것에 깊은 감사를 드리고 싶다 우린 지리적으로 강화도는 섬에 속해있고 많은 비가 내려도 바로 바다로 물이 빠져 나가니 설령 논이
비로 침수 되었다 해도 하루가 지나면 모두 제모습이 들어난다
도로나 건물도 마찬 가지로 이번 장마에 피해를 본것이 별로 없었다 이것은 바다와 인접해 있어서 그런 피해를 최소화해 피해가 나지 않는 것으로 안다 내가 어린시전(1961)년 우리집앞에 내뚝(강화말) 배수로가 비만 오면 배수로 정비(콘크리트관 미설치)가 안되어 꼭 뚝이 터져나가 동네 어르신들이 비가 그치면 나와 집짚으로 짠 쌀가마에 흙을 담아 배수로를 정비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후 배수로 정비는 내가 고등학교 졸업후(1973년)에 배수로가 정비하고 나서는 뚝터진것을 보지 못한것 같다 그이후로 아무리 비가 와도 뚝터진것을 본적이 없다 그러나 종종 일시에 비가 많이 내려 논과 밭이 침수된것을 본적이 있었다 그러나 하루 이틀 사이에 물이 모두 빠져나가 벼가 쓰러진것과 흙에 묻힌것을 제외 하고는 피해가 없는것으로 안다
이만큼 육지와 떨어져 섬으로 되어있는곳은 장마 피해가 덜하다 그것은 바로 빗물이 바다로 흘러나가기 때문이다 대신
가을 태풍은 섬과 육지를 가리지 않는다 태푸이 닥쳐오면 많은 강우량을 몰고 오는데 이때 논이침수되고 산사태(2012년)도 일어난다 태풍으로의 강화도는 안전 지대가 아니다 다만 장마비는 예외가 된다
이처럼 강화는 육지와 달리 장마비 영향을 덜 받는것 같다 집중적인 호후가 아닌 이상 장마비 피해는 극히 저조하다 이것이 바다와 4면으로 형성된 강화만의 지리적 특징이 아닐까 생각되고 그래서 비피해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 적은것 같다 이번 글을 쓰게 되면서 내가 알고있는 강화에 대하여 더욱더 궁금하여 인터넷 백과사전에서 찿아보니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강화도
경기만 내의 한강 하구에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5번째,인천광역시에서는 제일 큰 섬이다. 강화군의 중심 섬이며, 주변에 약 15개의 섬들이 흩어져 있다. 원래는 3개의 섬이었으나, 간석지가 넓게 퍼지면서 연결된 것이다. 최고봉인 마니산(469m)을 비롯하여, 400m 내외의 산이 많으나 험준하지 않다. 저평한 충적지가 발달했으며, 남쪽 강화만으로는 넓은 간석지가 펼쳐져 있다.
기후는 대체로 한서의 차가 심하며, 비가 많다. 1월평균기온 -4.7℃ 내외, 8월평균기온 25℃ 내외, 연강수량 1,143㎜ 정도이다. 같은 위도의 내륙지방보다는 따뜻하여 난대성식물인 탕나무·동백나무 등이 자생한다.
강화읍을 중심으로 도로가 사방으로 나 있으며, 1970년에 강화대교(694m)가 건설되면서 육지와 연결되어 교통이 더욱 편리해졌다. 특히 곳곳에 역사적인 유물·유적이 많아 안보·사적관광지로도 손꼽힌다. 면적 293㎢, 해안선 길이 99km
강화(江華)라는 지명은 940년(태조 23)에 처음 등장하였다. 이전에는 해구(海口), 혈구(穴口) 등으로 불리다가 이 때에 강화현으로 편제하였다. 강화는 강과 관련된 지명으로, 한강, 임진강, 예성강등의 ‘여러 강을 끼고 있는 아랫고을’이라고 하여 강하(江下)라고 부르다가 ‘강 아래의 아름다운 고을’이라는 뜻으로 강화(江華)라고 고쳐 부른 듯하다.
강화도는 원래 김포반도의 일부였으나 오랜 침식작용으로 평탄화된 뒤 침강운동으로 육지에서 구릉성 섬으로 떨어져 나왔다. 섬의 남쪽에는 제일 높은 마니산(469m)이 있는데, 산꼭대기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참성단(塹星壇)이 있다. 그 외에 중서부의 진강산(441m)과 중북부의 고려산(436m) 등을 비롯하여 낙조봉(343m)·혈구산(466m)·별립산(400m) 등 여러 산이 있으나 험준하지는 않다. 지질은 대체로 결정편암과 화강편마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곳곳에는 낮고 평평한 충적지가 발달해 있으며, 특히 해안에는 넓은 개펄이 발달하였는데, 오래전부터 간척사업을 실시하여 농경지로 조성되었다.
강화도의 중심인 강화읍은 고려 전기에 강화현에 속하였고, 1232년(고종 19) 몽골의 침입으로 왕실이 개경에서 천도한 뒤에는 강도(江都)의 소재지로 기능하였다. 1377년(우왕 3)강화현이 강화부로 승격된 이후에는 부치(府治)가 자리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강화군 소속된 이래 1994년까지 경기도 강화군에 속하였다. 1995년에 강화군이 인천광역시에 속함에 따라 인천광역시 강화군 소속이 되었다
강화도에는 강화군 행정구역 1읍 12면 가운데, 교동면·삼산면·서도면을 제외한 1읍 9면이 있다. 인구는 2010년 기준으로 2만 6138세대, 6만 1021명(남 3만 467명, 여 3만 554명)이 거주한다.
경지면적은 논 86.66㎢, 밭 33.41㎢, 임야 140.41㎢이다. 산지가 많지만, 평탄한 농경지에서 쌀, 잡곡 등이 많이 생산된다. 특히, 해안 간척지에서 생산되는 쌀을 비롯하여 인삼·화문석·강화 순무 등은 대표적인 특산품이다. 수산물로는 조기·병어·민어 등이 주로 잡힌다.
교통은 육지에 못지않게 도로가 잘 정비된 편으로, 강화읍을 기점으로 도로가 사방으로 통한다. 1969년 12월에는 강화도와 육지 사이의 염하에 길이 694m의 강화대교가 놓여 육지와의 교통이 매우 편리해졌고, 1997년 12월에는 길이 780m의 새로운 강화대교가 완공되기도 하였다. 2002년 8월에는 동남부의 길상면 초지리와 염하 건너편의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약암리를 연결하는 길이 1.2㎞의 초지대교가 개통되었다. 이러한 연륙교로 인해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서 강화도로 진입하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강화도는 역사의 현장이자 관광 명소이다. 섬 전체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부근리 지석묘를 비롯하여 역사적인 유물들이 곳곳에 분포한다. 마니산의 참성단에서는 매년 10월 3일에 단군제를 지내기도 한다. 이 밖에도 삼랑성·전등사·보문사 등의 유적이 알려져 있다.
이와같이 내가 거주하는 강화도에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경제규모 지형 지병유래등 참 많은것이 수록 되어있음을 알게되고 전체적인 지형적이점과 원레김포반도에 속했던것이 섬으로 벗어나게 되었다는점과 그밖에 내가 모르고 살던 내고향 강화를 처음알게되는것도 참 많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