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양산 산행을 하다 봉암사라는 사찰을 처음 방문하게 되었다 봉암사는 경북 문경에 있는 사찰로서 1년에 단 하루만
사찰을 개방한다고 한다고 하여 서 일까 이날 은 마침 4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이라 하여 많은 신도분들이 봉암사를
찾아 부처님 봉축 행사를 기년하고 있었다
봉암사를 뒤로 희양산이 있어 산 이름도 특이한데 봉암사라는 천년 고찰 대형 사찰을 맛나게 되다니 참으로 특이한
인연의 사찰로 깊이 간직 하고져 시간을 내어 봉암사에 대한 사찰 방문기를 작성하게 되었다
봉암사는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지장대사가 이 봉암사 경내에 탑과 각종 보물로 지정 되어 있는 전통 사찰
이었다
봉암사에 도착 한 시간은 산행을 마지막 코스로 여정이 되어 오후 4시경 봉암사 일주문을 통하게 되어 들어 서니
우선 사찰 경내가 너무 사찰건물과 조화를 이루며 경내에 사찰 재배하는 감자밭과 각종채소를 길러서 스님들의
식사용으로 하고 계시고 무었보다 일주문 전에 청보리밭이 푸르는 5월 부천님 오신 날을 기념하듯 청색이 유난히
깊고 간결하였다
경내에는 여러 개의 가람배치를 지형과 희양산의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아주 아름 다룬 전통사찰의 일명ㄴ을 잘 보여주고 있었고 가람 배치가 저기 적소에 배치되어 넓은 공간의 지형구조에 맞게 있어 보기가 좋았다 그리고 대웅보전의 넓은
법당 안에 부처님과 재단 이 너무나 깨끗하고 아름다워 너무 조았고 그리고 법당 안이 너무 잘 정돈되고 부처님상과 여러
부처님이 상아 숨 쉬고 있는 듯 정말 아름 다고 멋짓 사찰이었다
봉암사 경내에는 음수대 감로수 음수대가 대형 석상으로 광장마다 3개가 있었는데 가득히 고여 흘러내리는 감로수 물이 산행을 하고 나서 일까 정말 물맛이 너무 싱싱하고 맛이 좋다 그래서 3개의 감로 음수대에서 3번씩 가가가 마셔보았는데
살짝 달듯한 물맞이 여직것 다른 여러 사찰에서 마셔본 것 중 단연 으뜸이었다 사찰 음식은 오늘 비록 먹지는 아니하였어도 봉암사 물맛이 좋으니 음식도 맛이 좋을 것 같다
봉암사 경내에는 최근에 들어선듯한 요사채가 여러 채 보였는데 전통 한옥 사찰구조로 나무와 벽이 너무 조화를 이르며
비록 작고 단층으로 되어 있어도 우리 사찰 건축으로의 멋을 더하고 있다 특이나 이곳은 스님의 선학공부를 하는 공부방이
2개 동으로 스님들이 정진하는 곳이라 한다고 하니 산으로 둘러 쌓인 조용한 이곳 스님들의 공부방이 스님들의 수행정진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 너무 좋았다
이곳에는 지중대사의 부도탐과 비문이 고스란히 보존되고 있는데 이곳 비문에는 지중대사가 특이하게 태어난 이력과
당시 중국으로 공부하고 돌아와 우리나라의 선을 이어가는 가교역할을 하셨다는 이야기와 그 당시 신라의 생활환경을 고스란히 이탑의 글씨에 새겨져 있다 하니 정말 우리나라 불교의 역사적 장소가 봉삼사가 아닌가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봉암사 좌측 개울가 근처에 미륵불이 모셔져 있는데 특이하게 갸울을 끼고 있어 개울에서 흘러내리는 물소리와 주변 자연이 너무 잘 어우러진ㄴ 미륵보살상이 천년을 이어 내려오고 있는 것을 보아 이곳 일대가 예전부터 불교신앙이
강하게 자리하고 우리나라 불교교육의 선방역할을 선두에서 이끌어준 곳 이 이곳 봉암사가 아닌가 한다
나는 오늘 봉암사 경내를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1년에 한 번 개방하는 이곳을 찾게 되어 개인적으로 너무 고맙고 감사한 마음으로 우리 불자가 첫째로 지녀야 할 보시바라밀의 마음으로 경내를 참배 순례하며 이처럼 찬란한 불사인 보암사가 앞으로 더욱 발전하여 우리나라 불교 교육의 미래를 밝혀주리라 믿어보며 봉암사에 대한 나의 방문기를 가름할까 합니다
리그를 쓰면서 봉암사에 대하여 더욱더 많은 것을 알고파 인터넷 백과사전을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봉암사 , 봉암사 3층 석탑, 봉암사 지중대사비탑
봉암사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희양산(曦陽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지선이 창건한 사찰.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이다. 신라 선문구산(禪門九山)의 하나인 희양산파의 종찰(宗刹)로서, 879년(헌강왕 5)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지선(智詵:智證國師)이 창건한 이래 현재까지 선도량(禪道場)으로 일관해 온 선찰(禪刹)이다.
창건 당시 지선은 희양산 중턱의 봉암용곡(鳳巖龍谷)에 선궁(禪宮)을 만들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전통적 선사상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지만, 선가(禪家)의 토착화를 위한 한 방편에서 생겨난 것으로 보고 있다
.
881년 나라에서 봉암사라는 이름을 내렸다. 그리고 조선 초기에는 기화(己和)가 1431년(세종 13)에 절을 중수한 뒤 오랫동안 머물면서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宜)』를 저술하였다. 그 뒤 1674년(현종 15) 화재로 소실된 뒤 신화(信和)가 중건하였고, 1703년(숙종 29) 불전과 승려가 불탔으나 바로 중건하였다. 1915년에는 세욱(世煜)이 다시 퇴락한 당우를 중건하였으며, 1927년 지증국사의 비각(碑閣)과 익랑(翼廊)을 세웠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신라 경순왕이 한때 피신한 것으로 전해지는 극락전이 있는데, 건물의 가구방법(架構方法)이 이채롭고 천장 꼭대기에 석탑 상륜부의 모양으로 보주(寶珠)를 얹고 있음이 특이하다. 그리고 사문(寺門)과 나란히 있는 요사채 이외에는 모두가 신축된 건물로서 절 중앙 상부에 대웅전이 있고, 대웅전 오른쪽에는 규모가 큰 선원(禪院)이 있으며, 넓은 경내 도처에는 수채의 건물이 서 있으나 다른 절과는 달리 편액을 걸고 있지 않다.
이 절의 오른쪽에는 1963년 보물로 지정된 지선의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과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가 있다. 그리고 절 앞 뜰에는 지선이 세운 것이라고 전해지는 1963년 보물로 지정된 봉암사 삼층석탑이 있는데, 기단구조에서 특이함을 보이며, 상륜부가 완존함으로써 주목되는 탑이다.
그 뒤 이 절은 935년(태조 18)에 정진대사가 중창하였는데 1963년 보물로 지정된 봉암사 정진대사탑과 봉암사 정진대사탑비가 있다. 정진국사탑비는 규모가 지증대사탑비와 같으며, 일주문을 100m 앞둔 곳에서 오른쪽으로 계곡을 건너가면 밭 가운데 있다.
희양산 산정에는 40m 정도의 벼랑을 이룬 암봉에 다섯 줄이 파여 있는데 이것은 명나라의 이여송(李如松)이 조선의 흥기를 막기 위하여 칼로 혈도(穴道)를 끊은 것이라는 전설이 얽혀 있다. 또한 봉암사의 용바위에서는 가뭄이 계속될 때 기우제(祈雨祭)가 행하여졌는데, 특이한 것은 삶은 돼지머리로 지내지를 않고 산 돼지를 몰고 올라가서 바위 위에서 찔러 피를 흘리게 하여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용이 피 묻는 것이 싫어서 비를 내린다는 속신에서 유래한다.
이 밖에도 희양산에는 대궐터라고 불리는 석성(石城)과 군창지(軍倉址)가 있고, 산록에는 홍문정(紅門亭)·배행정(拜行亭)·태평교(太平橋) 등 임금과 관련된 명칭을 가지는 곳이 많아 신라 후기의 난세 때에 경순왕의 행궁(行宮)이 있었던 곳임을 증명해 주고 있다. 또한 봉암사 주변 계곡에는 기생이 세상을 비관하여 몸을 던졌다는 용연(龍淵)을 비롯하여 최치원(崔致遠)이 낚시를 즐겼다는 취적대(取適臺), 야유암(夜遊巖), 백송담(柏松潭), 백운대(白雲臺) 등의 소(沼)들이 있다.
또한 사찰에서 서쪽으로 300m 떨어진 계곡에 위치한 옥석대(玉石臺)는 암석에 조각된 불상 아래 넓게 깔린 암반에서 목탁소리가 난다는 명승지이다. 이 옥석대에는 바위의 북벽을 다듬고 7∼10㎝ 정도의 깊이로 감형(龕形)처럼 판 곳이 있는데, 그 안에 높이 약 6m의 좌상(坐像)이 양각되어 있다.
산내 부속암자로는 절 북쪽 중턱에 백련암(白蓮庵)이 있다.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1871년(고종 8)에 유겸(裕謙)이 중수하였다.
봉암사 삼층석탑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봉암사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석조 불탑. 보물.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높이 6.31m. 석탑은 단층 받침돌 위에 탑신부(塔身部)를 두고 상륜부(相輪部)를 완전히 갖춘 모습이다. 특히 단층 받침돌은 주변 지역에 있는 석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으로, 전형적인 신라 석탑이 하대에 이르러 변화하였던 과정을 짐작하게 한다. 석탑 앞에는 배례석(拜禮石)이 있는데, 앞면과 옆면에 각각 2구와 1구의 안상(眼象)이 조각되어 있다.
단층 받침돌의 아래에는 넓고 네모난 바닥돌인 지대석(地臺石)을 깔았다. 바닥돌 아랫부분에는 곡선을 그리는 1단의 받침이 있어, 마치 아래에 있는 어떤 구조물의 덮개돌인 듯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덮개돌로 보기는 어렵다. 바닥돌의 윗부분에는 제법 높은 굄 모습의 하대석(下臺石)이 있다. 그 위의 받침돌의 면석은 4장의 돌로 구성되었는데, 모서리 기둥과 1개의 가운데 기둥이 각각 새겨져 있다. 면석 위의 덮개돌에는 밑면에 쇠시리인 부연(副椽)을 얇게 나타내었고, 윗면에는 둥글고 각진 굄 장식을 두어 위의 몸돌을 받치게 하였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 올렸다. 각 층의 몸돌에는 모서리 기둥이 조각되었다. 지붕돌의 추녀 밑은 직선이지만 낙수면의 전각(轉角)에 이르러서는 반전(反轉)을 이루고 있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1~2층이 5단이고, 3층은 4단으로 줄어들었다.
3층 지붕돌 위에는 철간(鐵竿)이 관통하면서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상륜부가 자리하고 있다. 맨 아래에는 두 개의 돌을 포갠 듯한 노반(露盤)이 있고, 그 위에 반원형의 복발(覆鉢)이 놓였는데, 겉면에는 두 줄의 가로띠 위에 네 장의 꽃잎이 돋을새김 되었다. 복발 위에 놓인 앙화(仰花)는 네모난 각 면과 네 모서리에 6장 또는 4장의 연꽃잎을 배치하고 그 위에 5겹의 보륜(寶輪)을 꽂은 모습이다. 다시 그 위에는 단면 8각의 보개(寶蓋)를 놓고서 불꽃 모양으로 만든 ‘십(十)’자형의 수연(水煙)과 함께 용차(龍車), 보주(寶珠)를 올렸다. 이 가운데 보개의 모습은 고려시대에 건립된 부도의 지붕돌과 비슷한 것이어서, 아랫면에는 1단의 받침을 두었고, 8개의 귀마다 연꽃을 조각한 귀꽃을 표현하였다. 완전한 모습을 갖춘 이 석탑의 상륜부는 현재 전하는 석탑 가운데 매우 드물고 귀한 사례로 알려져 있다.
석탑의 북쪽에는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보물, 1963년 지정),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국보, 2010년 지정), 문경 봉암사 정진대사탑(보물, 1963년 지정)이 자리하고 있다.「봉암사사 적기」에 의하면, 879년(헌강왕 5)에 지증도헌(智證道憲, 824~882)이 개산(開山)한 뒤 881년에 왕실에서 봉암사라는 사액을 내렸다고 하였으므로, 석탑은 이때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봉암사 지중대사비탑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봉암사에 있는 통일신라의 승려 지증대사(智證大師) 도헌(道憲)의 탑비(塔碑)이다. 탑비(부도비)는 승려의 출생에서 사망까지의 행적 등을 기록한 비석으로, 고승(高僧)이 입적한 후 그의 죽음을 추모하고 존경심을 나타내기 위해 승탑(부도)과 함께 세워졌다. 비문에 적힌 기록을 통해 도헌이 입적한 882년(신라 헌강왕 8)으로부터 42년 후인 924년(신라 경애왕 1) 경에 건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도헌(道憲)은 824년(신라 헌덕왕)에 태어나 882년에 입적한 승려이다. 840년(신라 문성왕 2) 경의(瓊儀)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아 승려가 되었으며, 계람산 수석사(水石寺)에 들어가 혜은(慧隱)의 북종선(北宗禪) 선법(禪法)을 이어받았다. 현계산 안락사(安樂寺)를 거쳐 희양산에 봉암사(鳳巖寺)를 창건하고,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하나인 희양산문(曦陽山門)을 개창(開創)하였다. 882년(신라 헌강왕 8) 도헌이 안락사에서 입적하자, 헌강왕은 도헌에게 '지증(智證)'이라는 시호(諡號)와 '적조(寂照)'라는 탑호(塔號)을 내렸다.
귀부·비신·이수로 구성되어 있으며 귀부와 이수는 화강암으로, 비신은 편마암으로 제작되었다. 비석의 전체 높이는 486cm이고, 이 중 비신의 높이는 273cm이다.
귀부(龜趺)는 거북 모양으로 만든 비석의 받침돌로 비신과 이수를 지탱하는 역할을 한다.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의 귀부는 입에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얼굴로 묘사되었으며, 등에는 육각의 귀갑문(龜甲文)이 새겨져 있고, 비 좌(碑座: 비신을 세우기 위해 홈을 판 자리)의 4면에는 우주와 탱주를 새기고, 측면에 공양상(供養像)을 조각하여 장식하였다.
비신(碑身)은 탑비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부분으로 선종의 전래 과정과 도헌의 행적에 대한 기록 등이 새겨져 있다. 비문에 의하면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던 최치원(崔致遠)이 885년에 헌강왕으로부터 찬술을 명 받아 893년(진성여왕 7)에 비문을 완성하였으나, 이로부터 31년 후인 924년이 돼서야 혜강(慧江)에 의해 비신에 글씨가 새겨졌다. 비문의 본문 내용은 서(序)와 명(銘)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序)'에는 신라의 선종사(禪宗事)를 기록하였고, '명(銘)'에는 도헌의 생애를 칠언시(七言時)로 기록하였다.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의 비문은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경주 승복 사지 대숭복사비, 보령 성주사지 대낭혜화상탑비의 비문과 함께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 중 하나에 속한다.
이수(螭首)는 탑비의 머리 부분으로 장식적인 역할과 비신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이수 중앙에 마련된 제액(題額: 비석의 명칭이나 비석의 주인공을 새긴 부분)이 마련되어 있으며, 제액을 중심으로 용, 구름, 연꽃 등의 문양이 조각되어 있다. 이수의 가장 윗부분에는 소원을 들어준다는 구슬인 보주(寶珠)를 올렸다.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는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하나인 희양산문(曦陽山門)을 개창한 도헌의 탑비라는 점과 비신에 기록된 비문이 최치원이 지은 사산비명(四山碑銘) 중 하나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비석에 새겨진 비문에는 도헌의 행적뿐만 아니라 선종이 전래된 역사와 계보가 기록되어 있어 역사학·불교학에서 중요한 사료로 평가되며, 비석에 쓰인 글자는 금석학·서예학 등의 분야에서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 전체적인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귀부와 이수의 화려한 조각 장식은 통일신라시대 탑비의 대표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역사적·학술적·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0년 1월 4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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