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글,좋은시

야화 (32)칼 그림자

한마음주인공 2022. 5. 26. 17:33

오늘 고교동창 이재혁님이 카톡으로  %%%%  야화 (32)칼 그림자   %%%%라는 글을 주셔서 사진을 첨부 정리해

작은별밭 가족들과 함께 공유 하려 합니다

 

 

 

 

야화 (32)칼 그림자 

13살 어린 새신랑이 장가가서 신부 집에서 첫날밤을 보내게 되었다. 

왁자지껄하던 손님들도 모두 떠나고 신방에 신랑과 신부만 남자 다섯살 위 신부가 따라주는 합환주를 마시고 어린 신랑은 촛불을 껐다. 

 

 

 



신부의 옷고름을 풀어주어야 할 새신랑은 돌아앉아 우두커니 창만 바라보고 있었다. 보름달빛이 교교히 창을 하얗게 물들인 고요한 삼경에 신부의 침 삼키는 소리가 적막을 깨뜨렸다. 바로 그때 ‘서걱서걱’ 창밖에서 음산한 소리가 나더니 달빛 머금은 창에 칼 그림자가 스치고 지나갔다. 

 

 

 



어린 새신랑은 온몸에 소름이 돋고 아래위 이빨은 딱딱 부딪쳤다. 할머니한테 들었던 옛날 얘기가 생각났다. 첫날밤에 나이 든 신부의 간부인 중놈이 다락에서 튀어나와 어린 신랑을 칼로 찔러 죽여 뒷간에 빠뜨렸다는 얘기! “시, 시, 신부는 빠, 빠, 빨리 부, 부, 불을 켜시오.”

 

 

 

신부가 불을 켜자 어린 신랑은 사시나무 떨듯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신부 집은 발칵 뒤집혔다. 꿀물을 타온다, 우황청심환을 가지고 온다, 부산을 떠는데 새신랑은 자기가 데리고 온 하인 억쇠를 불렀다. 행랑방에서 신부 집 청지기와 함께 자던 억쇠가 불려왔다. 

 

 



어느덧 동이 트자 새신랑은 억쇠가 고삐 잡은 당나귀를 타고 한걸음에 30리 밖 자기 집으로 가버렸다. 새신랑은 두번 다시 신부 집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춘하추동이 스무번이나 바뀌며 세월은 속절없이 흘렀다. 그때 그 새신랑은 급제를 해서 벼슬길에 올랐고 새장가를 가서 아들딸에 손주까지 두고 옛일은 까마득히 망각의 강에 흘러보내 버렸다. 

 

 

 



어느 가을날, 친구의 초청을 받아 그 집에서 푸짐한 술상을 받았다. 송이산적에 잘 익은 청주가 나왔다. 두사람은 당시를 읊으며 주거니 받거니 술잔이 오갔다. 그날도 휘영청 달이 밝아 창호가 하얗게 달빛에 물들었는데 그때 ‘서걱서걱’ 20년 전 첫날밤 신방에서 들었던 그 소리, 그리고 창호지에 어른거리는 칼 그림자! 그는 들고 있던 청주 잔을 떨어트리며 “저 소리, 저 그림자.” 하고 벌벌 떨었다. 

 

 



친구가 껄껄 웃으며 “이 사람아. 저 소리는 대나무잎 스치는 소리고 저것은 대나무잎 그림자야.” 

그는 얼어붙었다. 세상에 이럴 수가! “맞아 바로 저 소리, 저 그림자였어. 그때 신방 밖에도 대나무가 있었지.” 그는 실성한 사람처럼 친구 집을 나와 하인을 앞세워 밤새도록 나귀를 타고 삼경녘에야 20년 전 처가에 다다랐다. 새신부(?)는 뒤뜰 별당채에서 그때까지 잠 못 들고 희미한 호롱불 아래서 물레를 돌리고 있었다. 

 

 



그는 문을 열고 “부인!” 하고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새신부는 물레만 돌리며 “세월이 많이도 흘렀습니다.” 그는 땅을 치며 회한의 눈물을 쏟았지만 세월을 엮어 물레만 돌리는 새신부의 주름살은 펼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