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들어 처음으로 고추 영농교육을 양도면 자체센터 신축회관에서 농협 주관하는
영농교육을 받았다 아침일찍 전동찬형님,전정범형님,전정일,그리고 내가 참여하기위해 인산 농산물판매점에서 전정법 형님차를 타고 강연장 마당에 도착하니 오전 9시반이다
강연장에 들어서니 200자석 규모가 모두 다 꽉차고 엽과 통로에 임시의자를 배치하고서도 서서 강연을 듣는 영농교육장의 분위기를 알게한다 우리 양도에도 고추를 많이심고 고수학 작물임을 알게한다
*영농 교육중에 옆에 않아서 교육중인 전동찬,전정일님
고추 영농을 강의 하신분은 농협종묘 경기지사 황대연지사장이다 올해뿐 아니라
해마다 고추영농교육을 하였다고 한다 특히 고추품종을 칼라무라 나 칼라왕을 추천
해준다 칼라무라가 무난한 품종이라고 한다
*교육후 중국식당에서..........
오늘 교육에서 배운것은 질소질 비료는 잎과 줄기성장에 꼭 필용하고 과다사용을
억제하라고 한다 그리고 중간에 칼슘과 붕소가 혼합된 걸음을 꼭 주라 권하는것을
알게된다
그리고 밭이 건조하지 않도록하고 추비시 물에 타서 효과가 바로 나오게 하라 한다
고추바이러스병은 진디물과 성층벌래라 한다 그리고 살균제는 오전에 살포하고 살충제는 오후에 살포하라 한다
*김취려 장군 묘 가는중에 누군가가 몰래버린 쓰레기 한차...................
비료에서 오는 가스피해를 방지 하기 위에 3월경에 우박이나 비료를 뿌려 갈아 업어 놓는것이 고추농사에 효과적이라 한다 그리고 고추의 약제살포는 비가오기전에 하는것이 가장ㅇ효과적이고 비가 온후라면 비가 그치는대로 바로 살포해 주어야 하는것이 가장 바람 직하다 고 한다
모든 작물에 칼리,붕소 칼슘 성분을 반드시 주어야 효과 적이라고 한다 맞춤비료에도
붕소성분이 포함되어 있지만 추비로 추가적으로 줄것을 권하고 있다 오늘 교육중에
양도면에 가주하는 이들이 이렇게 많은 줄을 정말 몰랐다
교육을 마추고 근처 중국식당에서 우리5인은 중국식 짭봉(7천원/1닌당,탕수육/8천원)
과 술한잔을 먹고 하오고개로 오다가 정제두선생 바로건너편 김취려묘 가는길로 들어가 김취려묘 주변을 돌아보고 산위로 올라갔다
김취려 장군에 대하여 백과사전에서 알아보니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김취려장군
김취려(金就礪, 1172년 ~ 1234년 3월 22일(음력 2월 21일[1]))는 고려 후기의 문신, 장군이다. 본관은 언양(彦陽)이며, 예부상서(禮部尙書) 김부(金富)의 아들이다. 충렬왕과 충선왕의 후궁인 숙창원비의 할아버지 또는 증조부이다.
고려 고종 때 몽고군에 쫓겨 서북면을 침략한 거란족을 격퇴한 공으로 수태위(守太尉) 중서시랑(中書侍郎) 평장사(平章事) 판이부사(判吏部事) 태사(太師)에 올랐다. 고려 고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위열(威烈)이다.
그리고 다시 김취려장군에 대한 울산 언양김씨 종친회에서 펴낸 상세한 내용을 접하고 지금까지 무심코 지나치던 이곳 김취려묘가 어찌하여 강화 양도 하일리에 있게
되었는가를 살펴보고 자료를 옮겨 보았다
김취려는 문인이자 장군이었다고 김취려 묘지명 해독문에 명시하고 있다
문하시중 고려명장 김취려묘지명 해독문(門下侍中 高麗名將 金就礪墓誌銘 解讀文)
(언양김씨대종회)증시(贈諡) 위열공(威烈公) 수태사(守太師) 개부의동삼사 문하시랑 평장사(開府儀 同三司門下侍郞平章事) 상장군(上將軍) 판이부사(判吏部事 ) 김(金)의묘지명(墓誌銘).
공(公)의 성(姓)은 김(金)이요, 이름은 취려(就呂-就礪)이며, 언양현(彦陽縣) 사람이다. 조부(祖父) 언량(彦良)은 금오위섭랑장(金吾衛攝郞將)이며, 아버지 부(富)는 금오위대장군(金吾衛大將軍 )이다. 어머니 대부인(大夫人) 주(朱)씨는 수검교장군행랑장(守檢校將軍行郞將) 세명(世明)의 딸이다.
공은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도량이 넓고 식견이 깊었으며 기풍이 활달하고 인품이 출중하였다. 어려서 부음(父蔭)으로 벼슬에 나아가 병오년(명종16년, 1186)에 대오(隊伍)의 장(長)이 되었으며, 대오의 품계(品階)로부터 장수의 직급에 오른지 얼마 안 되어 태자부(太子府)에 들어와 견룡행수(牽龍行首)가 되었고 이어서 왕실을 호위하는 어견룡행수(御牽龍行首)로 옮겼다.
*김취려장군 묘 뒷산은 찿는이가 없는지 잡초와 산길이 구분이 안된다
지유(持諭)및 관천부(菅千夫)시에는 변방을 지키고 궁내를 호위하는 일에 공적(功績)을 떨쳤다. 여러 차례 승진하여 대장군(大將軍)이 되고 서북면(西北面) 지병마사(知兵馬使)가 되어 장월(杖鉞)의 위엄으로 악왕(岳王)의 예봉을 꺾으니 당시에 명성이 우레와 같았다. 병자년(고종3. 1216) 가을에 거란 적이 변경을 침입하였다는 소식을 임금께서 듣고 곧 삼군에 명하여 토벌하도록 하였다.
공은 후군사가 되어 양군(兩軍)과 더불어 군대를 정비하고 나아가 적을 만나 싸워 이기니 공훈이 많았다. 조양(朝陽) 개평(開平) 묵장(墨匠) 향산(香山)의 싸움에서 홀로 아군의 선봉이 되어 적을 크게 격파하자, 그 적들이 아군을 피하여 서해도(황해도)로 퇴각 하였다. 정축년(고종4, 1217) 2월에 임금이 행영(行營)의 원수에게 오군(五軍)을 거느리게 하고 공을 금오위상장군에 임명하여 후군을 거느리게 하였다.
공이 안주(安州) 부근에 주둔하였으나 행영이 불리하게 되어 패주함을 보고는 공이 홀로 힘을 다하여 싸웠으며 창과 화살이 몸을 뚫는 것도 알지 못하고 싸우다가 겨우 목숨을 부지하였다. 명을 내려 개경으로 돌아오게 하였으나 임금이 다시 오군(五軍)에 명하여 적의 남로(南路)를 막게 하고 또 공을 다른 장수에 대신하여 전군사 (前軍使)로 삼았다. 공이 이에 고통을 참고 임금의 명을 따라 행군하면서 교곡(交谷:麥谷)에서 싸워 이겼다.
박달재에서 크게 승리한 이후에 세력을 잃은 적들은 남쪽을 도모하다가 동쪽을 거쳐 그들의 나라로 돌아갔다. 11월에 공이 병이 들자 장수와 군사들 모두가 개경으로 돌아가서 병을 다스릴 것을 청하였으나 공은 “내 차라리 죽어서 변경을 지키는 귀신이 될지언정 어찌 개경에서 편안히 지낼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공에게 개경으로 돌아오도록 조서(詔書)가 내려와 가마를 타고 개경으로 가서 몇 달 뒤에 병이 나았다. 무인년(고종5. 1218) 정월에 신호위판예빈성사(神號衛判禮賓省事)로 전직되었다. 9월에는 임금께서 명하여 학사(學士) 조충(趙沖)을 중군원수로 삼고, 공을 병마사로 삼아 원수와 함께 동주(洞州) 성주(成州) 은주(殷州)로 행군하면서 곳곳마다 적군을 만나 모두 승리를 거두었다. 자주성(慈州城)에 웅거하게 되자 군사를 훈련시키면서 적의 동태를 살피었다.
12월에 몽고(蒙古)가 동쪽변방으로부터 국경을 침입해 들어와 몇 군데의 성을 잇달아 함락 시키면서, 양국이 화친을 맺고 함께 거란 적을 쳐 부시자는 문서로써 아군에게 지원병을 요청하여왔다. 이에 여러 장수들은 용감하게 나서겠다는 말을 하지 못하였으나 공이 홀로 수염을 휘날리면서 소리 내어 말하였다. “일이 어렵더라도 사양하지 말아야하는 법이니, 내가 곧 그 임무를 맡겠습니다.”하고 병사 일만 명을 거느리고 몽고의 막하(幕下)에 도착하였다.
몽고의 장수가 “공의 나이가 몇 살이십니까.” 라고 물은 뒤 공에게 형이라 하고 동쪽에 앉게 하였다. 몽고가 이같이 우리 공(公)을 공경 한다는 것을 우리 원수가 듣고, 많은 군대를 동원하여 도착하니 적군(거란군)들이 두려워하며 항복하였다. 몽고는 기뻐하여 우리 군사와 더불어 형제가 되기로 하고 돌아가게 되니 공이 조양까지 가서 송별(送別)하였다.
이때 왕명(王命)이 있어 공(公)을 서경재제사(西京齋祭使)로 삼았는데, 재제(齋祭)를 마친 뒤 영주(寧州)로 돌아와 원수와 함께 개선하였으며, 기묘년(고종 6, 1219) 3월에 임금께 복명(復命)하였다. 또 동년 10월에 의주(義州)의 역민(逆民)을 처치하기 위해 공은 우군사로서 중군, 후군과 함께 의주로 떠났다. 경진년(고종7.1220) 정월에 임금이 공을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임명하면서 다른 장수를 대신하여 중군사(中軍使)로 삼았다. 이때에 북쪽 이웃나라의 우가하(亏加下)가 의주의 반역민에 호응하여 의주에 이르렀으나, 아군의 원성을 듣고 도리어 반역민들을 베어 그 머리를 아군에게 전해준 뒤에 그들의 나라로 돌아갔다.
아군은 의주에 머물면서 군사들로 하여금 무고한 역민은 다스리지 않게 하고 반역민들을 안심케 잘 처치하고 신사년(고종 8, 1221) 5월에 개경으로 돌아왔다. 공은 군사들과 함께 전쟁터에 나간 지 모두 35년 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12월에 판추밀사(判樞密事)에 올랐으며, 임오년(고종 9, 1222) 12월에 금자광록대부 참지정사 판호부사(金紫光祿大夫 參知政事 判戶部事)로 승진하였다.
을유년(고종12. 1225) 12월에 판삼사사(判三司事 ), 무자년(고종15, 1228) 12월에 수태위 중서시랑평장사 판병부사( 守太尉 中書侍郞平章事 判乓部事 ), 경인년(고종17, 1230) 정월에 판이부사(判吏部事), 12월에는 수태보(守太保), 임진년(고종19, 1232) 3월에 수태부 개부의동삼사 문하시랑평장사(守太傅 開府儀同三司 門下侍郞平章事 )가 되었으며, 계사년(고종 20, 1233) 6월에 수태사(守太師)를 더하고, 이해 12월에 특진주국 (特進柱國 )을 더하였다. 공은 이른 나이(早歲)에 여러 관직을 수행하면서 의로우면서 용감하고 청렴하면서 강직하였다. 전쟁에 나가면 장수가 되고 조정에 돌아오면 재상이 되니 나라에 보탬이 된지가 오래되었다.
공은 갑오년(고종 21, 1234) 2월 14일에 미미한 병세를 보이다가 21일에 갑자기 돌아가시니 향년 63세이다. 천자(天子)께서는 몹시 슬퍼하며 조문하고 부의를 내리셨다. 공은 복야(僕射) 조언통(趙彦通)의 따님을 부인으로 맞아들여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두시고 뒷일을 처리하게 하였다. 7월 12일에 (강화) 진강산 대곡동(鎭江山 大谷洞) 서쪽 기슭에 예장(禮葬)하였다.
명(銘)하여 이른다.
장상(將相)의 중책을 다 겸한 사람이 그 누구인가 오직 공(公)만을 이름이니 세상에 둘도 없는 분이셨네. 밖에 나가면 장수가 되어 그 위엄이 우레가 치는 듯 하였고 안에 들어와서는 정승이 되어 그 덕은 비가 내려 대지를 적시듯 하였네. 여러 적을 물리치니 도총(都摠)에 임명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만일 공업(功業)으로 논 한다면 마땅히 수(壽) 복(福)을 누리셔야 할 것인데 어찌 환화(幻化)하시어 이미 선이(仙輀:상여)를 재촉하였는가? 이제 그 택조(宅兆)를 정하여 묘지(墓誌)로서 이를 기록하노니 후손들이 이어서 경사스럽게 여길 바는 하늘의 은밀한 도움이 여기에 있는 것이네
이처럼 오늘 뜻하지 않게 이곳을 지나는 길에 들러 이곳 김취려 장군의 고매한 충정심과 장수로서 훌륭한 업적을 기록하고 있는것이 다시금 강화지역의 문화제를 다시
만난 뜻깊은 하루가 되었던것 같다 아울러 이곳은 강화도 문화재로 제25호로 지적되었다고 한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환의 시대, 우리 자녀는 아디로 20200114am10 (0) | 2020.01.19 |
---|---|
석모도 온천 여행 20200106 (0) | 2020.01.19 |
2019년 을 보내면서 20191231 (0) | 2019.12.31 |
콩 불리기 20191205 (0) | 2019.12.12 |
작은별밭 초겨울 회식20191206 (0) | 2019.1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