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코스 : 종로3가역하차 2번 출구 ⇒ 종묘 ⇒ 종묘 외대문 ⇒ 향대정 ⇒ 자궁, 세자재실 ⇒ 전사정 수복방,제정 ⇒
정전 ⇒ 정전서문 ⇒ 영녕전 ⇒ 양영전뒤 북쪽으로 해 다시 종묘입구인 외대문으로 나옴
아침 아침 일찍 종묘를 가보고 싶어 지하철 1호선 종로3가역에서 하차하여 2번 출구를 나와 같은 방향으로 30여 미터를
지나니 우측으로 세운상가 옛 상가건물이 나오고 좌측 편으로는 종묘로 이어지는 공원길을 좌측으로 돌려고 하니 그 앞에
하마비가 세워져 있다 이비는 말을 타고 가다가 말에서 내려서 종묘 앞으로 가야 한다는 표시다
그리고 3m 정도에 조그만 돌다리가 나와 종묘에서 나오는 물을 건너는 길이 나오게 예전 다리를 복원해 놓은 곳이 있어
그위 북쪽 방향으로 걸어가니 종묘 출입문(외대문)에서 입장티켓을 예매하고 문으로 들어가니 넓은 공원 같은 종묘가 시작된 고이 곳 우측 안내판에 문화해설서 안내가 오전 11시 20분에 있다고 해 잠시 차를 한잔 마시고 해설사와 함께하는 시간을 기다렸다
드디어 여성 해설사 시간이 되어 종묘에 대한 역사적 이야기 조선시대 왕과 왕의 후손을 모셔놓은 종묘에 대하여 해설을 듣고 망묘루를 지나 향대정(제사음식 샘플 제사상)에 들러 마루안으로 들어가 왕의 지바에 대하여 설명을 듣는데 3개의 지방 중 제사에 는 서편을 더 상위로 분류되며 지방 가운데 상하로 혼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정갈한 제사용 그릇과 향의 이미는 향을 켜 놓으면 그 향불을 따로 신이 들어온다고 한다 그리고 바닥에는 술을 조그만 구멍으로 부어 땅의 기운을 불러온다 하여 하늘과 땅이 합쳐진 합일 하여 신위를 모시고 제를 올랐다고 한다 조선시대
유교의 영향으로 이런 풍습이 중국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한다 여기서 우리가 혼쭐난다는 말의 어원이 지방의 구멍임을 알게 한다
이어 향대정을 빠져나와 자궁과 세자제실을 안내하며 임금은 항상 북쪽으로 하고 지단도 2 개단으로 하여 세자제실과 비교되게 하였다 한다 이어 다시 수복방과 전사장으로 가 제사음식을 검사하는 단과 그리고 제사에 사용되는 소고기 양고기 돼지고기 등을 제사에 올렸다고 하고 그 재료들은 이근 종묘부근에서 가축을 길렀다 한다 특이 제사음식에 사용하는 전용 우물인 제정이라 우물이 아직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어 정전으로 들어가는 남문을 통과하여 들어가니 정전(종묘대표적 나무건축물)이 지금 기와 공사를 위해 전면 카버로 덮여있고 그림만이 공사천막에 그려져 아쉽게 했다 올 9월 말에 공사가 완성된다고 하니 그때 다시 한번 와줄 것을 당부한다
매년 5월 토용일에 종묘제례가 있다고 한다
정전에서 나와 다쉬 좌측 위에 영녕전으로 옮겼는데 이곳은 태조이성계 가 왕이 되며 그 아버지 할아버지등의 지방을 모션 놓았는데 이를 이렇게 고심한 분이 세종임금이라 한다 영위 전의 넓은 앞마당에서 종묘건축물을 대신 보게 된다 이종묘가
조선시대 역대 왕위를 모신곳이라 하여 유네시코에 등록되었다고 한다
오늘 종묘 문화해설사의 동행하며 들으니 종묘에 대한 건축 문화 종묘 탄생과 이와 관련된 역사이야기를 듣게 되고 이래서
역사문화여행은 꼭 문화해설사와 함께 하고 시간대를 알아두어야 할 것 같다 나는 영녕전을 끝으로 종묘문화해설을 끝마치고 북쪽 산책길을 따라 서북으로 이어지는 조묘 산책길을 걸으며 길주변에 큰 갈참나무 수령 300년이 넘은 듯 그리고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이런 나무와 숲을 보는 것이 종묘이상으로 많은 것을 알게 한다
이 글을 쓰며 종묘에 대하여 궁금하여 인터넷 배가 사전에 들어가 가니 다음같이 기술하고 있다
종묘의 건물은 1395년10월 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그 해 12월에 지어졌고, 임진왜란 때에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즉위년(1608년)에 다시 지어졌다.
종묘는 사적으로 지정 보존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정전(국보), 영녕전(보물), 종묘제례악(국가무형문화재), 종묘제례(국가무형문화재)가 있으며,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건물들은 정전(正殿)과 영녕전(永寧殿)으로 나누어 정전에는 정식으로 왕위에 오른 선왕과 그 왕비의 신주를 순위에 따라 모시고, 영녕전에는 추촌(追尊)된 선왕의 부모나 복위된 왕들을 모셨다. 그리고 정실의 출생이 아닌 왕이 그 사친(私親)을 봉안하는 사당으로서 따로 궁묘(宮廟)를 두었다.
종묘의 제사일은 4계절의 첫 달 상순, 정초·단오·한식·추석, 동지의 납일과 매월 삭망(朔望) 일로 정하였으며,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친제 하여 왕세자는 아헌관, 영의정은 종헌관이 되어 작헌(酌獻)·분향(焚香)·재배의 복잡한 절차를 밟으며 향사한다. 그러나 국상일의 경우에는 이를 피한다.
종묘행사는 국가적 행사인만큼 이에 따르는 의식과 의복·제기(祭器)의 규격, 제물(祭物)의 종류·수 등은 엄격하게 규정하고 준수한다 그리고 분묘와 달리 고려의 예를 따라 역대 공신을 위한 공신종사(功臣從祀)가 있다.
종묘의 건축물들과 600여 년간 제례행사를 지내 온 가치가 인정되어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으며, 종묘제례(중요무형문화재)와 제사를 지낼 때에 춤과 함께 연주되는 음악인 종묘제라약(중요 무형문화재, 세종대왕 작곡)은2001년 유네스코으로 등록되었다.
종묘제례는 매년 5월 첫째 주 일요일에 어가행렬과 함께전주이 씨 종친에 의한 제사로 거행된다.
종묘는 사직단과 함께 조상에 대한 예절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조선의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종묘제악
조선시대 종묘에 제사드릴 때 연주하는 기악과 노래와 무용의 총칭. ‘종묘악’이라고도 하며 1964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종묘라 하면 정전(正殿)을 지칭하는 것이나 사실은 그 서편에 조묘(祧廟)인 영녕전(永寧殿)이 있어 두 사당으로 이루어졌다. 종묘는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도 있었으나 음악을 제향에 사용하기는 고려 초기 숙종 무렵이다.
이때의 음악이 어떠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 뒤 송나라에서 대성아악(大晟雅樂)이 들어와 1116년(예종 11) 10월부터 아악이 사용되었으나 체계가 갖추어진 것이 못 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시대의 것을 답습하다가 1395년(태조 4) 11월 고려의 옛 제도를 바꾼다는 원칙 아래 종묘악장(宗廟樂章)을 고쳤으나 그 음악에 관하여는 자세히 알 수 없다.
1405년 4월에 조묘(祖廟)·사직(社稷)·문묘(文廟) 등 배신(陪臣)의 제복(祭服)과 악기 등이 모두 낡아서 사용할 수 없게 되어, 다음 해 7월에 내사(內史) 박린(朴麟)과 김희(金禧) 등이 중국으로부터 악기를 들여와 그 해 10월부터 종묘에서 사용하였다.
1425년(세종 7) 세종은 이조판서 허조(許稠)에게 “우리는 향악(鄕樂)을 익혀왔는데 종묘에 먼저 당악(唐樂)을 연주, 초헌·아헌을 한 다음 종헌에 이르러 향악을 연주하니 조상들이 평소에 듣던 음악을 쓰는 것이 어떠한가.” 하였고, “아악은 본래 우리나라 음악이 아니므로 평소에 익히 듣던 음악을 제사용으로 쓰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살아서 향악을 듣다가 죽으면 아악을 연주하니 어찌 된 까닭인가.” 하여 음악의 모순을 힐문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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