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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년 뒤를 내다본 조선의 천재 학자- 율곡 이이
율곡 이이는 아버지 이원수와 어머니 신사임당의 일곱 남매 중 셋째 아들로 중종 31년(1536년) 외가인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율곡 선생은 어린 시절을 외가가 있는 강릉에서 보냈고,
여섯 살 때 아버지가 있는 서울로 올라왔다.
신사임당은 율곡 선생의 태몽으로 용꿈을 꾸었다.
그래서 어릴 때 이름도 '현룡(見龍)'이라 했고
선생이 태어난 방을 '몽룡실(夢龍室)'이라 불렀다.
율곡 선생은 어릴 때부터 유난히 총명하여 세 살 때 글을 읽었고, 여덟 살 때 '화석정시'를 지었으며
열살 땐 '경포대부'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리고 열세 살의 나이로 진사초시에 합격을 하였다.
그런데 율곡 선생은 자애 가득한 어머니를 여의게 되었다.
그는 3년 상을 지내며 세상의 허무함을 느끼고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 경전을 읽었다.
그리고 1년 만에 하산해 글공부에 다시 전념하였다.
그 후 1564년 7월에 생원시에 장원한 이후 아홉 번의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호조좌랑으로 벼슬길에 들어선 율곡은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1570년에는 해주 야두촌에 들어가 학문에 전념했다.
하지만 1571년,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게 된 이이는 청부목사가 되었으나 곧 그만 두었다.
그 후에도 다시 임금의 부름을 받아 잠시 황해감사를 지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워낙 율곡 선생은 벼슬보다는 학문에 뜻을 두고 있었다.
그래
서 높은 벼슬을 받고 조정에 나갔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 연구에 매진하기를 수차례였다.
율곡 선생은 서경덕의 학설을 이어받아 주기설(主氣說)을 발전시켰다.
우주 만물이 존재하는 근원은 '기(氣)'이며
기를 모은 현상은 기가 움직이는데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는 학설이다.
'이(理)'는 기가 작용하는 속에 숨어 있으므로
모든 현상의 변화나 발전은 기의 작용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율곡 선생은 아는 것보다 실천을 더 중요시한 학자였다.
후에 이 주기설은 퇴계 선생의 이기이원론과 대립하기도 하였다.
그는 어느 날, 퇴계 선생을 직접 찾아가 학문을 논하였다.
율
곡 선생은 퇴계 선생에게 우주의 본체는 기와 이,
이기이원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퇴계 선생의 학설을 인정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와 기는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고
또 먼저와 나중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이와 기는 세상이 생기면서부터 동시에 존재하여
영원히 떨어질 수 없다고 퇴계 선생의 사상을 비판하였다.
율곡의 말을 들은 퇴계는 반박을 하기보다는
율곡의 학문적 깊이에 크게 놀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율곡의 학문은 현실적인 문제 해결을 중시하는 실천적 학문으로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며 기호학파의 형성을 주도하여
조선시대 성리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또한 율곡의 이런 학문 경향은 정치, 경제, 교육, 국방 등에 걸쳐 구체적인 개선책을 제시해 큰 업적을 남겼다.
사창(社倉) 설치, 대동법 실시, 십만양병설 주장 등 사회정책에 대한 획기적 선견은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 중 율곡이 주장한 '십만양병설'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1582년 겨울,
조선에는 함경도 변방을 지키던 수령으로부터
여진족 오랑캐들이 남쪽으로 내려와 우리 나라를 쳐내려 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런 흉흉한 소문이 무성한 가운데
선조는 조정내에 의논할 대신이 없어 율곡을 병조판서로 명(命)했다.
병조판서에 임명된 율곡은 군사들의 실태를 파악하고
장수들을 모으고 의용군들을 모아 여진족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다음 해 율곡은 '시무육조'를 지어 선조에게 올렸다.
시무육조에는 조정에 어질고 능력 있는 선비를 등용시키고 변방에 병력을 배치하여
나라의 경계를 더욱 철저히 하며
전쟁에 필요한 군마를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선조는 이런 율곡의 주장에 대해 찬성했다.
그러나 평소 이이를 시기하고 질투했던 대신들은 무조건 그의 주장을 반대하였다.
하지만 율곡은
"우리 나라는 당파싸움으로 나라의 힘이 너무도 약합니다.
이 상태로 십 년만 더 가면 외적의 침입을 막지 못하고 나라가 어려운 곤경에 빠질 것이 분명합니다.
십 년 내에 군사 십만 명을 양성하여
한양에 이만명과 각 도에 일만 명씩을 두고 위급한 사태를 대비해야 합니다."라며 대신들을 설득했다.
이것이 유명한 율곡의 '십만양병설'이다.
그러나 평소에 이이를 시기하던 대신들은 나라의 예산이 없다는 이유로 반기를 들었고
선조도 율곡의 주장을 묵살해버렸다.
그 후 9년이 지난 선조 25년(1592년),
율곡의 예상대로 온 나라를 불바다로 만든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이토록 학문이 깊고 식견이 넓었던 율곡 선생은
선조 17년(1584년) 48세의 나이로 안타깝게도 별세하여 법원음 자운산 기슭, 지금의 자운서원에 묻히게 되었다.
저서로는 학교모범, 성학집요, 격몽요결, 소학집주등과 이를 집대성한 율곡전서가 있다.
인조 2년(1624년) 문성(文成)이란 시호가 내려졌고
숙종 7년((1681년) 문묘에 배향되었다.
율곡 선생과 관련이 깊은 지역이 세 곳이 있다.
그 중 첫째가 경기도 파주고, 둘째는 강원도 강릉, 셋째는 황해도 해주 석담이라는 곳이다.
경기도 파주는 대대로 율곡 선생의 집안이 자리를 잡아 살던 곳으로
현재도 화석정, 자운서원 등 율곡 선생의 유적이 있다.
그리고 강원도 강릉은 율곡 선생의 외가가 있던 곳으로 이곳에서 태어나 6세까지 자란 고향이다.
지금도 오죽헌과 송담서원이 남아 있다.
율곡 선생은 아들을 얻지 못해 부인 셋을 두었었다.
첫째 부인 곡산 노씨는 딸 하나를 낳았지만 일찍 죽고 더는 자식을 낳지 못했다.
그는 해주의 석담에서 둘째 부인을 얻었으나 아이를 두지 못해,
셋쩨 부인을 얻어 그곳 해주에서 첫아들을 낳자 둘째 부인이 또 곧 둘째 아들을 낳았던 곳이다.
이중에도 율곡 선생은 파주와 석담을 좋아해 시간이 날 때면 이곳을 들렀고
대부분의 학문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이 선생의 호인 율곡과 석담도 각각 이 두 지역의 지명을 그대로 딴 것이다.
-조선왕조 야사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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