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주사를 가다 20241125
우연한 기회에 아니 아침에 일어나 때 전혀 계획이 없던 속리산 법주사를 가게 되었다 법주사는 참 오래된 사찰이다
법주사는 고교시절 수학 여행을 갔다 온 곳이기도 하다 50년 만에 법주사안으로 들어가며 받은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감동적이다
내가 찻아간 11월 25일 오후 3시 반 이날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혼자 일주문을 들어서며 법주사로 이어지는 도로가
늦은 가을의 정취를 더한다 단풍잎은 붉게 물들어 떨어지고 고목의 나무들은 이제 겨울 준비로 앙상한 가지만이
이 가을 마지막 가을을 아쉬워한다
일주문을 들어서서 조금 걸으니 법주산 안내도가 들어오고 잠시 법주사의 연혁을 새겨보며 들어서니 바로 팔상전이
옛 모습 그대로 내부의 4 변 각 중앙 1층에는 작은 부처님과 관세움 보살님이 아주 소박하고 예전 그 모습 그대로
관광객을 안내한다
1단 팔상전 내부로 들어가 참배를 드린 후 내부를 살펴보니 겉모습과 달리 내부는 8각으로 된 커다란 내부는 1층외엔 전부 텅 비어 있고 이 팔상전내부 참배하고 돌면서 비록 임진라런으로 왜구들에게 점령당해져 불타고 없어지고 새로이 신축했다고 안내도에서의 설명을 듣고 사찰에서의 모든 것이 어느 한순간 앗아간 당시의 시대 상황을 그려보게 된다
일단 팔상전에 들어가 참배하고 나와 보니 앞에 쌍사자 석등이 에전에는 비가 맞는 옥외에 방치되어 있었는데 지금 방문해
실제 보니 쌍사자 석등을 보호하는 비 막음 전통사찰 가옥이 설치되어 있고 사람의 접근을 못하게 목재로 경계책이 설치되어 있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천년의 신비를 자아내게 한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자의 꼬리 부분은 떨어진 그대로이다
이어서 조금 걸어 올라가니 큰 규모의 대웅보전이 보이며 가는 길옆에 심어져 있는 보리수나무 한그루가 이곳이 예전부터 사찰이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대웅보전에서 다시 참배하고 대웅전 안을 들러 보니 큰 부처님의 존엄성과 자비함이 큰
기쁨으로 다가온다 비록 창립당시 본래 모습은 아니지만 그래도 큰 부처님상들을 보면서 다시금 부처님의 존엄성과
위대성이 그대로 우러러 나오게 해 큰 기쁨이었다
대웅보전을 끝으로 다시 돌아 우측으로 돌아 나오며 옥외에 설치된 큰 부처님이 저녁노을을 받으며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다가온다 일단 황금 부처님상 앞에 가 참배를 올리고 부처님 단 옆으로 된 통로를 한 바퀴 두 손을 모아 돌아보며 내자신속의
나를 돌아보며 거룩하신 부처님에게 마음속의 경배를 드려본다
황금 부처님 상을 뒤로하고 앞으로 나오니 우측에 큰 바위가 있고 마애불상이 있다 이번 방문에 법주사 경내에 마아 불상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다 일단 마애불상 앞에 참배하고 돌아서며 여기저기 바위 측면에 새겨진 많은 한문으로 된 글씨가 파져 있다 아마도 부처님을 위한 그런 좋은 글이 아닌가 하고 이곳 법주사의 다른 면을 보게 되어 이곳 법주사가 예전에 얼마나 많은 불자와 스님이 왕래가 많았섯을까를 상상해 본다
마애불상을 뒤로하고 개울을 끼고 계속 우측으로 내려오니 수정암이란 암자가 바로 법주사와 붙어 있어 그 안을 들어가 보니 어느 사찰과 다름없는 대한불교 조계정 수정암이다 예전에는 미치 보지 못하고 돌아왔던 수정암이란 사찰 경내를 출입구에는 이곳은 스님들이 기도 정진하는 곳이니 출입을 금한다는 푯말이 있음에다 문이 열려 있어 들어가 대웅전 밖에서 관람하고 돌아 나오려는데 작은 방에서 비구니 스님이 안에서 청소용품을 정리하는 것을 보고 합장하며 웃으며 돌아 나왔다
수정암에서 돌아 나와 시냇물을 돌징검다리를 건너 원래 법주사로 내려가는 큰길을 내려가며 늦게 아쉬움을 달래주는
늦은 단풍이 마지막 단풍이라 그러한지 더욱더 큰 아름다음 단풍으로 나를 위로해 주어 여러 사진을 촬영하고 나오니
이때 시간 이 벌써 오후 4시 반 이곳에 오려는 계획이 전혀 없이 오늘 갑작스러운 기회에 법주사를 방문하여 잠시나마
부처님의 위대한 자비심과 평등공법의 진리를 잠시나마 찾아보게 되어 마음 편한 좋은 시간 이 되었다
이 글을 쓰면서 속리산 법주사와 수정암에 대한 또 다른 것이 궁금해 인터넷 백과사전을 찾아보니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속리산 법주사 553년(진흥왕 14)에 의신(義信) 조사가 창건했으며, 법주사라는 절 이름은 의신이 서역으로부터 불경을 나귀에 싣고 돌아와 이곳에 머물렀다는 설화에서 유래된 것이다. 776년(혜공왕 12)에 금산사를 창건한 진표(眞表)가 이 절을 중창했고 그의 제자 영심(永深) 등에 의해 미륵신앙의 중심도량이 되었다. 그 후 법주사는 왕실의 비호 아래 8차례의 중수를 거쳐 60여 개의 건물과 70여 개의 암자를 갖춘 대찰이 되었다.
고려 숙종이 1101년 그의 아우 대각국사를 위해 인왕경회(仁王經會)를 베풀었을 때 모인 승려의 수가 3만이었다고 하므로 당시 절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며, 조선시대에 태조와 세조도 이곳에서 법회를 열었다고 전한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전각이 소실된 것을 1624년(인조 2)에 벽암이 중창한 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은 1624년에 중건된 대웅전, 1605년에 재건된 국내 유일의 5층 목탑인 팔상전, 1624년에 중창된 능인전(能仁殿)과 원통보전(圓通寶殿)이 있고 이밖에 일주문·금강문·천왕문·조사각·사리각, 선원(禪院)에 부속된 대향각·염화실·응향각이 있다. 또한 법주사의 중심법당이었으며 장육상(丈六像)을 안치했었다는 용화보전(龍華寶殿)은 그 터만 남아 있고, 이곳에 근대조각가인 김복진이 조성 도중 요절했다는 시멘트로 된 미륵불상이 1964년에 세워졌다.
1986년 이를 다시 헐고 1989년 초파일에 높이 33m의 청동미륵불상이 점안(點眼)되었다. 이밖에 국가지정문화재인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석련지(石蓮池:국보 제64호)·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신법천문도병풍(新法天文圖屛風:보물 제848호)·괘불탱(보물 제1259호)과 지방지정문화재인 세존사리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호)·희견보살상(喜見菩薩像: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8호)·석조(石槽: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0호)·벽암대사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1호)·자정국존비(慈淨國尊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9호)·괘불(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19호)·철확(鐵鑊: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43호) 등이 있다.
2018년 6월 30일 제42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산사(山寺), 한국의 산지승원'이라는 명칭으로 1천 년 넘게 우리 불교문화를 계승하고 지킨 종합승원 7곳 가운데 하나로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한국의 13번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함께 등재된 다른 여섯 곳은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공주 마곡사, 순천 선암사, 해남 대흥사이다.
법주사 수정암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 속리산(俗離山)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승려 의신이 창건한 암자. 법주사.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法住寺)의 산내 암자이다.
553년(진흥왕 14)에 의신조사(義信祖師)가 법주사와 함께 창건하였다. 1914년에 비구니 태수(泰守)가 이곳에 머물면서 그 개인의 원력(願力)으로 산신각·칠성각·독성각(獨聖閣)과 대선방(大禪房) 수십 칸을 신축하였으며, 1973년에는 극락전(極樂殿)과 진영각(眞影閣)·요사채 등을 중건하였다.
이 중 극락전 안에는 아미타불과 약사여래의 좌상, 후불탱화·신중탱화(神衆幀畵) 등이 봉안되어 있고, 대선방내에는 관세음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 밖에도 암자 입구에는 태수의 유골을 모아 1925년에 세운 부도(浮屠)와 탑비(塔碑)가 있으며, 암자 뒤의 추래암(墜來巖) 위에는 폐탑(廢塔)이 남아 있다.
이 암자는 법주사 경내의 유일한 비구니 수도처이기도 하다. 암자의 폐탑 북편에는 속칭 ‘거북바위’로 불리는 바위가 있는데, 명나라의 이여송(李如松)이 중국으로 향하고 있는 거북의 목을 쳐서 중국의 재화(財貨)가 조선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았다는 전설이 전래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