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개 정원을 가다 20230702
지난 주말인 20230702 교동도 화개정원을 다녀오게 되어 소개해 봅니다 제가사는 지척인 강화도에서
교동대교를 건너서 연산군 유배지가 있는 그자리에 2023년 5월 13일 정식 개장이 되어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라 이웃에 계시는 황골 전동찬 형님과 형님 친구 성정기 님과 3 이서 인산리 황골에서 10시 30분
출발하여 11시10분 화개정원 주차장에 도착했다
몇 년 전부터 화개 저 원 공사를 한다 하여 완공한 후 처음 찾는 곳인데 주차장엔 차들이 많이 들어서 있고
많은 사람이 화개정원 입구 에는 티켓을 구입하는라 분주해 보였다 일단 화개정운 입장료가 어른 5,000원이고
화개산 정상으로 가는 모노레일 탑승 승차권(어른 12,000원)은 따로 추가로 구입해야 했다
입장료는 강화도 사람이고 경로우대가 해당되어 화개정원 입장료는 인당 3000원 그리고 모노레일은 10,000원까지
되었는데 너무 비싸다고 해 걸어서 올라가 걸어서 내려오기로 결정하여 정원입구 출발해 연산군 유배지 시설 돌어보고
일;저리 정원길을 관람하며 50분이 되어 현장 도착했는데 아지도 정원은 초기시설이라 나무와 꽃이 정원을
갖추어가는 초기 단계라 좀 그러했습니다
날은 더워 30도에 흐린 날이었는데 웃옷이 흠뻑 젖고서야 전망대에 올라 스카이 워크길을 짜릿함ㄴ 기분으로 앞에 펼쳐진 고구저수지와 교동평야가 평화롭게 다가오고 바로 바닥 건너 연백과 북한지방이 그런대로 선명하게 다가와 한참을
이곳 교동도로 이북에서 갑자기 피난하며 다시 고향길로 향하려던 실향민의 연정을 생각해 봅니다
유동 교동은 이북에서 내려온 실향민이 많이 계시고 특히 대륭시장은 이들이 만들어 놓은 장터이기도 하고 지금은
단장되어 붉은 노을로 그 유명세를 더해가고 있다 그리고 이곳 화개정원은 약간 경사지를 따라 화개산(솥뚜껑을 덥어놓은 모습의 산)이라 정원공사 시 층층 계단형 석츧이 많이도 보여 조경공사에 많은 공을 들인 것 같다
그리고 올 5월에 개장했는데 관람객에 참 많기도 하다 주로 서울. 인천 멀리 경상도 상주에서 해병대 동기들과 부부와 함께왔다는 분도 계셨다 이처럼 화개정원은 앞으로 강화도의 정원으로서는 강화 랜드마크가 될 것으로 확신하며 지금 심어놓은 나무와 꽃들이 3~4년 지난 후에는 진 짜 제 모습을 들어낼 것으로 확신된다
우선 우리 강화 교동도에 이러한 관광시설이 들어선 것이 자랑스럽고 많은 관광객이 이곳 교동도를 차아주시길 기원해 본다 원래 이 자리 에는 연산군 유배지가 있었고 그 주변이 온통 밤나무 단지로 되어 있는 군유림이었던 곳이다 이곳에
강화군에서 550억이라는 큰 예산을 들여 보다 더 강화다은 교동도가 된 것 같다
우리가 확개정원을 구경하고 근처 교동 초교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차를 한잔 하며 오늘 교동도의 확개정원을
관람하며 식당 사장님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이곳 대륭시장 상인들 대부분 외지인이고 원래 이곳 주민이 대룡시장에서
장사를 하시는 분은 손에 꼽을 5명 정도이라하신다 그만 큰 이제 교동 대륭시장은 다 외지인이 와 사업하는 곳으로 바뀐
것이다
오늘 처음 화개 정원으로 들어가는 농협삼거리에서 진입하는 입구도로가 4차선으로 확포장 되어 있었고 주변의 모습도
예전과 달리 많이 달려져 있었다 한편으로는 화개정원이 들어서 이곳 교동도 주민들의 일터가 생기고 사업장이 생겨
교동도의 발전에도 확개정원은 더 큰 기대가 된다
교동도에 대하여 좀 더 알고 싶어 인터넷 백과사전에 들어가 살펴보니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교동도
강화도 북서부에 위치하며, 동경 126°16′∼126°21′, 북위 37°45′∼37°00′에 위치한다.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면 양사면과 내가면이 있고, 남쪽으로는 강화군 삼산면 석모도가 있다. 북쪽으로 불과 2∼3㎞의 바다를 끼고 황해도 연백 군이 있다. 따라서 섬 북부에서는 황해도 땅을 쉽게 바라볼 수 있으며, 좀 높은 곳에서는 예성강 하구를 볼 수 있고, 맑은 날에는 개성 송악산도 바라볼 수 있어, 실향민들이 화개산 산정에서 북쪽을 바라보며 망향제를 지내는 곳이기도 하다.
교동도는 『삼국사기』에 따르면 달을참(達乙斬), 고목근(高木根), 교동(喬桐)으로 바뀌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달을참이란 ‘크고 높은 산이 있는 고을’이라는 의미를 가진 지명이라고 전한다. 대운도(戴雲島), 고림(高林)이라고도 불렸다.
고도가 매우 낮은 섬으로 높이 0∼10m의 지역이 섬의 3분의 2를 이루고 있으며, 마식령산맥 서단에 해당한다. 가장 높은 산은 화개산(華蓋山, 260m)으로 이 섬의 주산을 이루며, 봉황산(75m)·율두산(89m)·고양이산(35m)·수정산(75m) 등 모두 100m 이하의 낮은 구릉들이다.
연백에 면한 동북해안은 제방을 쌓아 고구(古龜)의 관개용 저수지의 완성으로 경지확장 및 경지정리를 하였다. 해안선은 단조로우며, 연안의 저지(低地)는 이질(泥質)인 갯벌로 되어 있어서 어항의 발달은 불리하고, 간만의 차도 커서 선박의 출입도 그리 편리하지 못하다. 섬인 까닭에 한서의 차는 내륙에 비하여 작으나 언제나 해풍이 비교적 강하게 불며, 겨울에는 해안의 유빙으로 한기를 더욱더 조장한다.
내륙에 비하면 겨울이 빠르고 여름이 늦어 환절기에는 해상의 기류가 고르지 않아 때때로 소나기·회오리바람을 몰아오며, 때로는 서리나 우박이 내리는 등 날씨가 고르지 못하다. 연평균기온은 11.2℃, 연강수량은 1,390㎜이다.
상고시대에 이 섬은 개화산·율두산·수정산을 중심으로 세 개의 섬으로 되어 있었으며, 교동평야에는 언제나 조수가 흘렀고, 그것이 그 뒤 하나의 섬으로 변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것은 개화산 중턱에서 볼 수 있는 화석이 된 조개껍질이나 현 해안선에서 내륙에 위치한 패총의 흔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또, 남쪽에 있는 석모도 상주산 사이의 바다가 육화(陸化)되어 인마가 내왕할 수 있었다가, 1578년(선조 14) 경 다시 바다로 되어 간조 때 외에는 인마가 내왕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로 보아, 후빙기 이후 범세계적인 해면변동의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하천의 발달도 드물고, 작은 계류가 있을 뿐이다.
고구려 때에는 고목근현(高木根縣)이라 불렸고, 신라 경덕왕 때부터 교동이라 불려 혈구현(穴口縣)에 속하였다. 고려시대에도 교동이라 일컬었으며, 고려 명종 때 감무(監務)를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1395년(태조 4)에 만호(萬戶)와 지현(知縣)을 두었으며, 그 뒤 이를 고쳐 현감이라 일컬었다. 1629년(인조 7)화량진(花梁鎭)으로부터 수영(水營)을 교동 원권진(현 읍내리)으로 이전하면서 현을 부로 승격시키고 수군절도사 겸 부사를 두었다.
1633년 서남해의 방어를 더한층 강화하기 위하여 삼도통어사(三道統禦使)를 교동에 두고, 삼도, 즉 경기·황해·충청의 주사(舟師)를 통괄하게 하였다. 1777년(정조 1)에 이르러 교동부사를 격을 낮추어 현감으로 하였다가, 1779년에 통어사가 강화로 이속되면서 교동현감은 다시 부사 겸 방어사로 승격되었다. 1789년에 통어영(統禦營)이 다시 교동으로 옮겨왔다.
1866년(고종 3) 통어사가 다시 강화로 이속되면서 부사 겸 방어사로 변경되었다가, 같은 해 8월 또다시 통어사를 두었다. 1884년 해방영(海防營)에 통어사가 이속되어 부사 겸 통어사로 격이 내려갔다. 1895년 행정개편에 따라 읍을 폐하여 강화에 이속하였다가 1896년 읍이 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강화군에 속하게 되면서, 개화·수정의 두 면을 두었다가 1934년 두 면이 교동면으로 통합되었다.
인구는 광복 당시 8,644명이었던 것이 6·25 전쟁 뒤 많은 피난민으로 1965년에는 1만2443명에 달해 최고를 이루었다. 그러나 1972년부터 점차 감소하고 있으며, 1977년부터 감소현상이 심해지고 있다. 2009년 5월 현재 교동면 인구는 3,132명이고 세대수는 1,389호이다.
2006년 현재 교동면 전체 면적은 47.14㎢이고 논 25.89㎢, 밭 2.57㎡, 임야 11.45㎢이다. 조선시대부터 시작된 교동토의 간척은 일제강점기와 현대에 까지 지속되었다. 이로써 형성된 저평한 평야가 넓고, 완비된 경지정리·수리시설 기계화 등으로 쌀의 생산량은 섬의 자급자족을 넘어 다른 지방으로 나가며, 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감자 등과 임산물은 밤·대추·버섯 등이 생산된다.
밭에서 하는 인삼재배가 농가의 부업으로, 완초공예품은 강화도의 화문석처럼 그 이름이 높다. 완초공예품으로는 화방석·꽃삼합·광주리·손가방·화문석 등 다양하며, 그 가운데 화방석과 꽃삼합은 대도시로 팔려나가는데, 수익성이 높아 오랜 전통을 오늘날까지 지속하고 있다.
6·25전쟁 이전에는 4개의 정기연락선이 있어 육지와 서해도서가 자유롭게 연락되었으나, 전쟁 이후 매우 불편해졌다. 그러나 서울과의 연결은 강화도 창후리에서 수시로 배가 있었고, 연안도서를 연락하는 선편이 있었으나 불편한 편이었다. 2014년 교동대교가 완공되어 강화도와 연결되었고, 서울과의 교통이 편리해졌다.
육지와 격리된 섬인 까닭에 고려 중엽부터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유배지로 이용되었고, 지리적 위치상 외세의 침범이 빈번했던 관계로 섬에는 많은 고적이 남아 있다.
1629년에 축조된 읍성지(邑城址), 1173년경 축조된 것으로 추측되는 화개산성지, 교동구현허(喬桐舊縣墟)를 비롯하여, 고려희종이 유배되어 기거하던 경원전(慶源殿)과 철종잠저소(哲宗潛邸所)·봉수대(烽燧臺)·단묘(壇廟) 등과 그 밖에도 많은 유적들이 있다. 또, 명승지로는 교동팔경이 있고, 화개사·교동향교 등은 화개산 남쪽에 있다.
오염원과 축산농가가 없어 맑고 깨끗한 농업용수로 농사를 지어 생산한 교동쌀이 이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