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글,좋은시

(229)황룡

한마음주인공 2023. 4. 13. 14:49

오늘 고교동창 이재혁님이 카톡으로  &&& (229)황룡 &&&라는 글을

주셔서 사진첨부 정리 작은별밭과 함께 공유 합니다 

 

 

(229)황룡 

비 내리는 밤, 낫 빼든 최 진사 며느리 녹실댁과 머슴 바우의 간음 현장을 덮치고 마는데… 

최 진사가 헛간에서 낫을 빼들고 머슴 바우의 방으로 달려갔다. 밤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제정신이 날아간 최 진사의 발걸음이 닿자 마당에 고인 물이 철퍼덕거렸다. ‘홱’. 얼마나 세게 문고리를 잡아당겼는지 걸려 있던 안쪽 문고리가 쑥 빠져나갔다. 문을 박차고 나오는 머슴 바우를 향해 최 진사의 낫이 호를 그리자 ‘퍽’ 하고 핏줄기가 세차게 뿜어 올랐다. 최 진사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낫을 들고 방 한복판에 우뚝 섰고, 며느리는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흐느끼고 있었다. 최 진사는 말없이 그 방을 나갔다. 비는 계속 내리고 붉은 피가 엉긴 채 마당에 떨어진 바우의 눈알 하나는 누렁이가 먹어치웠다. 


이튿날 아침, 최 진사댁 드넓은 뜨락은 애써 지난밤의 일을 감추려는 듯 적막만 감돌았다. 머슴 바우와 간음을 한 며느리 녹실댁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최 진사의 아들이자 녹실댁의 신랑인 최 초시는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보름이 지나도록 집안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녹실댁의 친정은 최 진사네보다 부자에다 가문도 훨씬 더 좋았다. 게다가 조부로부터 배운 녹실댁의 학문이 신랑보다 뒤떨어지지 않아 다섯번이나 과거에 낙방한 최 초시는 항상 부인에 대한 열등감에 시달렸다. 그렇다고 녹실댁이 기생처럼 간살맞게 신랑을 대할 줄 아는 것도 아니라 그저 무덤덤하게 말이 없어, 최 초시는 주색에 빠져 집을 멀리하고 바깥으로만 겉돌았다. 


세상 성실한 머슴 바우에게는 최 진사의 며느리 녹실댁이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보였다. 작년 여름밤, 뒷우물에서 멱을 감던 녹실댁의 나신을 훔쳐본 후 용두질을 할 때마다 그 모습을 그리고는 이튿날 녹실댁을 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비 오던 그날 밤, 이경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문이 살짝 열리더니 녹실댁이 들어와 훌훌 옷을 벗고 바우 품에 안겼다. 바우는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하여 볼을 꼬집었다. 

그로부터 반년이 흐른 어느 날, 오른쪽 눈을 잃은 바우가 운휴령을 넘다가 산적을 만났다. 산적이 단봇짐을 열어보니 땡전 몇닢에 남의 밭에서 훔친 고구마 두어개가 전부라 바우 엉덩이만 차고 산속으로 발길을 돌렸다. 바우는 산적에게 매달려 산적이 됐다. 나이 지긋한 산적 두목은 어딜 가나 성실한 바우를 귀여워했다. 


산적이라야 다섯명이 전부인 조그만 떼거리가 산채에서 자고 있는데 관군이 쳐들어왔다. 산적들이 뿔뿔이 흩어졌는데, 바우는 가슴에 화살을 맞은 두목을 둘러업고 칠흑 같은 숲속을 정신없이 달렸다. 

관군의 추격을 피해 바위 틈새에 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자, 두목이 품속에서 무언가 끄집어내 바우에게 건넸다. 그러고는 곧바로 고개를 떨구고 숨을 거뒀다. 이튿날 날이 새자 바우는 두목을 양지 바른 곳에 묻어주고 산을 떠났다. 

어느 날, 두목이 숨을 거두기 직전에 자신에게 준 것이 생각나 펼쳐보니 기름 먹인 종이에 그려놓은 보물지도였다. 바우는 일거에 큰 부자가 됐다. 바우는 팔도강산을 돌아다녔다. 챙 넓은 갓을 쓰고 비단 도포를 입고 준마 한마리를 사서 발길 닿는 대로 가다가 날이 저물면 주막에 들어갔다. 


강산이 변한다는 십년을 그렇게 떠돌다가 소백산 자락 어느 주막에 들어가 평상에 엉덩이를 걸쳤다. 남정네 셋이서 술잔을 돌리고 있었다. “이 집 주모는 구멍에 금테를 둘렀는가!” “말도 말게. 금은방 주인이 천냥을 주겠다고 해도 퇴짜를 맞았어.” “뿐인가 어디, 사또가 윽박질러도 은장도를 꺼내는 통에 돌아갔다네.” 

그때 열살쯤 된 남자아이가 나오더니 바우 앞에 섰다. 핏줄은 지남철처럼 당기는 힘이 있다. 바우는 그 아이를 끌어안았다. 따뜻했다. 부엌에서 주모가 뛰쳐나왔다. “서방님을 기다렸습니다.” 그 목소리가 차분했다. 그날 밤, 녹실댁은 바우 품에 안겨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새벽닭이 울었다. 


“그날 아침부터 녹실댁이 서방님을 찾아오라 닦달을 해서 온 집안의 하인들이 기생집이다 주막이다 오만 군데를 뒤졌잖소?” 바우가 묻자 녹실댁이 웃으며 답했다. “새벽녘 꿈에 황룡 한마리가 제 치마 속으로 들어가 합방을 했지 뭡니까. 그날 이경이 지나기 전까지 잉태를 하면 태어나는 아이는 큰 인물이 된다는데….” 

그 말을 들은 바우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아까 그 아이가 내 아들이오?” “네, 서방님. 서방님을 만나려고 주막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