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자락서 묵 쑤는 미모의 과부
오늘 고교동창 이재혁님이 카톡으로 &&& 산자락서 묵 쑤는 미모의 과부 &&&라는
글을 주셔서 사진첨부 정리 작은별밭과 함께 공유 합니다
(217)약은 고양이 밤눈 어두워
산자락서 묵 쑤는 미모의 과부
뭇 사내들의 끝없는 구혼에도 늙은 노 생원과 결혼하는데…
개울 건너 산자락에 쓰러져가는 초가삼간이 있었다. 이엉을 이태나 갈지 않아 지붕에 마른 잡초가 무성했다. 그곳은 묵집이었다. 솜씨 좋던 시어머니가 죽고 며느리가 이어받았지만 묵맛이 신통치 않아 손님의 발걸음이 뜸했다. 그나마 찾아오는 손님들도 용건은 묵이 아니라 다른 데 있었다. 천하일색 며느리였다. 뒤꼍에서 절구질하고 맷돌이나 돌리던 며느리의 처지는 시어머니가 죽자 완전히 바뀌었다.
며느리는 옹골졌다. 치마 끝을 바짝 내려서 질끈 동여매면 딱 바라진 엉덩이 모양이 그대로 드러나 뭇 손님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손님들과 얼굴을 부대껴야 했기에 머리에 동백기름을 칠하고 얼굴에는 하얀 분을 발랐다. 그러자 며느리의 자태가 한층 더 고와졌다.
하지만 며느리는 행동거지가 반듯했다. 손님이 탁배기를 한잔 따라보라고 손이라도 잡으면 화들짝 뿌리치며 “쇤네는 주모가 아닙니다”하고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이처럼 미모뿐 아니라 품행까지 받쳐주니 동네 남정네들이 안달이 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무심하게 세월이 흐르던 묵집에 풍파가 닥쳤다. 시집온 첫해부터 골골대며 골방에 드러누운 신랑이 정말로 골로 간 것이었다. 그러나 며느리는 울지도 않았다. 서둘러 삼일장을 치르고 사십구재 후에 탈상해 묵집 문을 열었다.
어슴푸레한 소문에 의하면 며느리는 산더미 같은 신랑의 약값 빚을 갚기 위해 의원 영감에게 몸을 세번 내줬다. 이 소문에 남정네들은 전보다 더 자주 묵집으로 몰려들었다. 곧 남정네들의 부탁을 받은 매파도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풍채 좋은 천석꾼 오 첨지는 허구한 날 묵집에 가서 자신이 먹은 묵값과 탁배기값의 두세 배를 놓고 나왔다. 금은방을 하는 돈 많은 홀아비 조 참봉도 매파를 보내놓고 저녁마다 묵집에 들렀다. 어디 그뿐이랴. 박 대감, 천 초시, 우 진사 등등. 묵집은 한산할 날이 없었다.
묵집 과부에게 마음을 품은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돈 많은 홀아비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시집오면 엄청난 재산을 떼어주겠다며 과부를 꾀었다.
묵집을 뻔질나게 드나들며 과부에게 추파를 던진 홀아비들은 또한 하나같이 나이를 속였다. 작년에 회갑을 치른 조 참봉은 자신이 쉰다섯이라 우겼다. 손이 귀한 집안의 오 첨지는 장가를 일찍 들기 위해 나이를 부풀렸다고 주장했다. 어떤 이는 머리카락과 수염을 염색했고 또 다른 이는 아직 쌀 한가마니를 질 수 있다며 체력을 과시했다.
그런데 이상한 영감탱이가 하나 있었다. 대궐 같은 기와집에 사는 노 생원이었다. 그는 저잣거리에서 돈놀이나 하며 한량처럼 살았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쉰일곱의 노생원이 자신의 나이를 다섯 살이나 더 높여 예순둘이라 한 것이었다. 아버지가 호적에 늦게 등재해서 그렇다나.
노 생원은 자신에게 시집오면 재산의 절반을 주겠다는 각서를 써서 묵집 과부에게 들이밀었다.
과부는 혹했다. 노 생원의 살집은 근래 부쩍 줄었다. 얼굴에 저승점(검버섯)도 보였다. 묵집에 들러서도 콜록콜록 기침을 연방 하다가 탁배기 석잔에 픽 쓰러졌다. 노 생원이 머잖아 죽으면 그의 집과 재산은 모두 과부의 것이 될 터였다.
봄이 되자 동네 남정네들이 모두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다. 천하일색 젊은 묵집 과부가 잘생기고 건장한 이들을 제쳐두고 가장 늙고 병약한 노 생원을 새 남편으로 점찍은 것이었다.
이윽고 과부는 노씨 집안 족보에 이름을 올렸다. 그런데 한달쯤 지났을까. 묵집 과부가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노 생원이 자신이 가진 재산의 절반이라며 고작 천냥을 들이밀고서는 “기와집은 한양에 사는 장남 것이고 내게 남은 것은 천냥밖에 없다”고 실토한 것이었다.
더욱 실망스러운 것은 따로 있었다. 매일 닭백숙을 먹어 살이 오동통하게 오른 노 생원은 정력이 돋아 밤마다 묵집 과부의 치마를 벗겼다. 얼굴을 가득 메우던 검은 저승점도 먹으로 그린 것이었는지 모두 사라졌다. 노 생원이 죽을 날이 아직도 멀다는 뜻이었으니 오호통재(嗚呼痛哉)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