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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자 215

한마음주인공 2023. 3. 10. 09:47

오늘 고교동창 이재혁님이 카톡으로 &&&  팔자 215  &&&을 보내주셔서

사진첨부 정리 작은별밭과 함께 합니다

 

 

(215)팔자 

기생 어미를 둔 미인 ‘시화’ 

마을 사내가 상사병으로 죽자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는데… 

호조 참의가 문서를 뒤지며 열심히 공무를 보는데 사동이 오더니 웬 여인이 면회를 왔다고 전했다. 나가봤더니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이 묘한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나으리는 늙지도 않습니다요. 열두해 전 그 용안이 그대로시네.” “누구시더라?” 낯선 여인이 풀어놓는 사연에 참의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여인 왈, 십이년 전 자신은 영춘정 기생이었는데 술 마시러 온 참의와 하룻밤 만리장성을 쌓고 배가 불러와 딸을 낳았고, 그 딸이 지금 열넷이라 참의 호적에 올려달라는 것이었다. 


참의는 기억도 안 난다며 펄쩍 뛰었지만 그 여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판서를 만난다고 했다. 몇번의 만남 끝에 결국 두사람은 타협을 봤다. 그 여인과 열네살 그녀의 딸은 몰락한 어느 양반집 족보에 직계 손으로 올려졌다. 사기꾼 여인과 얼떨결에 양반 가문 규수가 된 딸은 족보를 가슴에 품고 한 많은 한양을 등졌다. 

이 기생의 내력은 이렇다. 얼굴은 피어나는 꽃이요, 가슴이 동산처럼 솟아오르고 엉덩이가 두쪽으로 바라질 때 뭇 남정네들은 나비와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하지만 눈 밑에 잔주름이 자글자글해지고 가슴과 엉덩이가 내려앉으면서 하루아침에 시든 꽃이 되자 남정네들은 본체만체했다. 기생집에서 밀려난 퇴기는 아비가 누군지도 모르는 딸 하나를 데리고 이 남자 저 남자 찾아가 딸을 맡으라며 돈을 우려냈다. 마지막으로 참의를 만나 양반집 종부와 열네살 규수로 신분 세탁한 것이었다. 


기생이 한양을 떠나 한달 만에 똬리를 튼 곳이 지리산 자락 산청이었다. 잡인들이 들끓는 저잣거리를 피해 양민촌 귀퉁이에 아담한 기와집을 마련했다. 어미는 자신의 딸만은 절대 화류계에 빠뜨리지 않고 양반집으로 시집보내 아들딸 낳고 반듯하게 살도록 만들겠다고 마음먹었다. 

열네살 딸 시화는 꽃처럼 피어났다. 어미는 권번에서 배운 시조 짓기, 사군자 치기를 딸에게 가르쳤다. 양반집 요조숙녀 훈련을 엄하게 시킨 것이었다. 넓지 않은 고을에 천하일색 처녀가 한양에서 내려왔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기 시작했다. 가끔 시화가 제 어미와 장터에라도 가는 날이면 총각뿐만이 아니라 처자식 있는 남정네들도 시화를 보려고 목을 뺐다. 오뚝한 콧날에 도톰한 입술의 시화가 사슴 같은 눈을 흘기면 남정네들은 입뚝 벌린 채 침을 흘렸다. 


매파가 찾아왔다. 들이미는 신랑감은 우생원의 열여덟살 둘째 아들. 저잣거리에서 신발장사를 하는데 벌써 논을 다섯마지기나 사놓았다는 것이다. 어미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아직 시화가 열네살이라서 이삼년 후에나 시집을 보내겠다며 매파를 돌려보냈다. 

한달 후에 그 매파가 또다시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이랬다. 두달 전에 시화가 우 생원의 둘째 아들 가게에 꽃신을 사러왔을 때 손수 꽃신을 신겨주고 나서는 혼이 빠진 듯 멍하니 중얼거리다가 드러누워 식음을 전폐한 채 상사병을 앓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리곤 ‘사람 하나 살려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시화 어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며칠 후 그 매파와 상사병 앓는 우 총각의 어머니가 찾아와 울면서 애원해도 어미는 거절했다. 우 총각은 사흘 후 숨을 거뒀다. 


상여를 맨 친구들이 피가 끓는 상여곡을 토해내며 시화네 집앞을 지나가다 멈춰 섰다. 상여꾼들의 발이 땅에 붙어버렸기 때문이다. 무릎도 발목도 꼼짝할 수 없었다. 지나가던 노스님이 꼭 잠근 대문을 열게 하고 집 안으로 들어가더니 보따리 하나를 들고 나왔다. 보따리를 풀어 시화의 치마를 꺼내 상여에 덮자 상여꾼들의 발이 조금 움직였다. 그리고 속치마와 고쟁이, 달거리 개짐을 상여에 걸자 “워어워어 북망산천이 어디메냐~”며 상두꾼의 곡이 다시 터지면서 상여는 떠나갔다. 

그 뒤 생기발랄하던 시화가 드러누웠다.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백약이 무효, 얼굴을 못 알아보게 초췌해졌다. 그때 그 노스님이 다시 들렀다. “이 집에 악기(惡氣)가 서렸네, 나무아미타불.” “스님, 우리 시화를 좀 살려주십시오.” 어미가 울면서 매달렸다. “소승의 비방을 듣겠는가?” “목숨만 살려준다면 무엇이든지….” “상사병에 걸린 사람이 우 총각뿐만이 아니네. 시화의 팔자는 만인의 여인이네.” 시화는 결국 기생이 됐다.